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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의 어둠 헤쳐 나간 아렌트 ‘사유 모험’

Summary

20세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위키미디어 코먼스 난간 없이 사유하기 한나 아렌트의 정치 에세이 한나 아렌트 지음, 신충식 옮김 l 문예출판사 l 4만3000원 정치철학자 한나 ...

20세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위키미디어 코먼스
난간 없이 사유하기

한나 아렌트의 정치 에세이

한나 아렌트 지음, 신충식 옮김 l 문예출판사 l 4만3000원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비롯해 생전에 단행본으로 출간한 여러 저작 말고도 수많은 글을 남겼다. 이 글들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 생산된 것들인데, 아렌트의 제자 제롬 콘이 이 글들을 시대순으로 엮어 두 권으로 펴냈다. 그 하나가 아렌트 학문 인생 전반기에 산출한 것들을 모은 ‘이해의 에세이 1930~1954’(2005)이고, 두 번째가 2018년에 출간된 ‘난간 없이 사유하기’다. 여기에는 1953년부터 1975년까지 인생 후반기에 아렌트가 내놓은 논문·강연·대담 42편이 실려 있다. 앞의 책은 10여년 전에 한국어로 번역됐으며, 이번에 두 번째 책이 우리말로 옮겨져 나왔다. 아렌트의 독창적인 사유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저작이다.

이 두 번째 책의 원서 부제는 ‘이해의 에세이 1953~1975’다. 그러므로 이 두 책은 ‘이해의 에세이’라는 큰 제목으로 묶을 수 있다. ‘이해’가 아렌트에게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는 뜻일 터인데, 그런 사실을 이 두 번째 책에 실린 1972년 학술회의(‘한나 아렌트에 대한 한나 아렌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아렌트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아무 일 안 하고도 아주 잘 살아갈 수 있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최소한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어요.” 아렌트는 행동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사태를 관찰하고 숙고하여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이해를 향한 집요한 노력이 아렌트 인생을 관통했다.

이 학술회의는 아렌트 저작을 중심에 놓고 저자와 직접 토론하는 것이었던 만큼, 아렌트 사상의 쟁점이 다수 등장한다. 그중 먼저 논의되는 것이 아렌트 후기 인생을 논란 속에 몰아넣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 일으킨 쟁점이다. 그 책에서 아렌트는 유대인 집단학살 실행자 아이히만의 정신적 특징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그러나 이 말은 무수한 오해와 오독을 낳았다. 참석자 한 사람이 “당신은 어떻게 아이히만이 우리 각자 안에 존재하는지 야무지게 지적했다”고 하자, 아렌트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저는 항상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아이히만’이라는 표현이 싫었습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 반대, 즉 아이히만이 누구에게도 없다는 말만큼이나 사실이 아닙니다.” 이 말을 할 때 아렌트가 염두에 두는 것은 자신의 정치철학 토대라 할 ‘인간의 복수성’이다. 인간은 언제나 특수한 개별자로 존재하기에 모든 인간을 뭉뚱그려서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을 추상화하는 일이다. 그런 추상화가 사유를 오류로 이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빚은 오해에 관한 해명은 ‘히틀러 평전’을 쓴 독일 언론인 요아힘 페스트와 한 대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지녔던 ‘악의 평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히만은 꽤 지성적이었지만 (…) 담벼락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 안 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어요. 이것이 제가 말하는 평범성의 의미입니다. 거기에는 뭔가 깊은 구석이라고는 아예 없어요. 악마와 같은 것도 없고요!” 아렌트가 말하는 ‘평범성’(banality)은 보통 ‘너무 흔해서 누구에게나 찾아볼 수 있는 진부성’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아이히만의 악은 아무런 뿌리도 깊이도 없는 악, 그래서 따분할 정도로 시시한 악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토록 평범한 악이 어떻게 그토록 가공할 악이 됐는가? 아렌트는 그 이유를 무사유, 곧 ‘사유 능력 없음’에서 찾는다. 사유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간략히 말하면 상상력이 없다는 뜻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상상력이란 나를 뛰어넘어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의 행정적 집행자로서 자신이 하는 일의 끔찍함을 죽음 앞의 유대인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보여준 악이 아무런 깊이도 근원도 없기에 지구 표면을 무한정 뻗어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악은 가자를 죽음의 수용소로 만든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도 있을 것이다.

아렌트 정치사상의 또 다른 쟁점인 ‘권력과 폭력의 관계’도 이 학술회의에서 거론된다.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그런 구분에 의구심을 드러내는 참석자들을 향해 아렌트는 ‘일인 대 모두’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한다. 권력의 극한이 ‘일인에게 맞서는 모두’라면, 폭력의 극한은 ‘모두에게 맞서는 일인’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한 사람에게 반대한다면, 그 한 사람을 제압하는 데는 어떤 폭력도 필요하지 않다. 반대로 한 사람이 기관총을 들고 모든 사람을 굴복시키는 상황이 폭력의 극한이다. 폭력의 극한은 권력의 종말이다.

아렌트가 주장하는 ‘권력’은 인간의 복수성을 전제로 하여 그 인간들이 의견을 제출하고 공론을 모아가는 과정에서 나온다. 정치란 이 권력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이 모두 똑같다면 권력 현상은 생길 수 없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는 욕구, 곧 지배욕도 생길 수 없다. 여기서 아렌트는 마르크스를 거론한다. 마르크스에게는 권력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정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추상적인 단수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가 변혁되면 인간이 변혁돼 정치는 사라지고 ‘사물의 관리’라는 행정 업무만 남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복수로 존재하기에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의견의 차이가 있고 이 의견의 차이를 바탕에 두고 권력 현상이 일어난다. 또 권력 현상이 일어나는 한 정치는 계속된다.

이 회의 말미에 아렌트는 ‘난간 없이 사유하기’라는 비유를 꺼낸다. “우리는 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전체주의 광기가 서구 전통을 붕괴시킴으로써 종교도 도덕도 역사법칙도 믿을 수 없게 된 상태에 처했다는 얘기다. 그러니 굴러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고 사유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아렌트는 19세기 정치사상가 토크빌을 인용한다. “과거가 미래에 빛을 던지기를 멈췄을 때 인간의 마음은 어둠 속을 방황한다.” 아렌트의 일생은 아리아드네의 실이 끊어진 채로 그 어둠의 미궁을 헤쳐 나가는 모험, 난간 없이 오르는 사유의 모험이었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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