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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빛의 도시 로마의 그늘진 삶들

Summary

줌파 라히리 소설집 ‘로마 이야기’의 무대인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날고 있다. 게티이미지 로마 이야기 줌파 라히리 지...

줌파 라히리 소설집 ‘로마 이야기’의 무대인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날고 있다. 게티이미지
로마 이야기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l 마음산책 l 1만6800원

제국의 역사와 유적을 후광처럼 거느린 로마는 세계 각지로부터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연구와 답사, 관광 목적으로 오거나 단기 거주를 위해 찾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생활 터전을 옮겨 오는 이들도 있다. 인도계 미국 소설가 줌파 라히리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2012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로마로 가족과 함께 건너가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어로 쓴 산문집 두 권과 소설집 하나를 출간했다. ‘로마 이야기’는 그가 지난해 낸 두번째 이탈리아어 소설집이다.

아홉 단편이 묶인 이 책에는 로마에 거주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특히 피부색과 문화가 다른 이주민들이 겪는 고초와 애환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첫 작품 ‘경계’는 로마 외곽 펜션 관리인의 어린 딸을 화자로 삼는다. “학교에서 나는 내가 남들과 좀 다르다고 느낀다. 나는 다른 학생들과 쉽게 섞이지 못하고, 학교에는 나와 비슷하게 생긴 학생이 없다.” 엄마는 이 나라가 폐쇄적이며 괜찮은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데, 거기에는 배경이 있다. 펜션 관리인 일을 하기 전에 아빠는 도시의 광장에서 꽃을 팔았는데, 어느 날 “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청년들에게 이가 부러질 정도로 맞아 응급실에 실려간 경험이 있다.

소설 속 대부분의 이주민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다. ‘쪽지’의 주인공은 초등학교에서 점심 시간에 교사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지켜보는 일을 하게 되는데, 아이들의 서투른 글씨체로 쓴 쪽지를 코트 주머니와 가방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너는 더러워” “우리는 네가 여기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같은 문구들은, 20년 이상 이곳에서 살며 쌍둥이 아들을 잘 키워 독립시켰고 “내가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이 여성의 소속감을 크게 흔들어 놓는다.

‘밝은 집’의 주인공 부부는 오랜 노력 끝에 자격을 갖추어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한다. “그 집에 들어가면서 나도 처음으로 도시와 동네로부터 보호를 받는다고 느꼈다. 지역 주민과 상점 주인들은 과장 없이 우리의 존재를 용인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일부 주민들이 안뜰에 모여 쑥덕거리더니 이 이주민 가족들을 향해 불쾌한 말을 날리기 시작한다. “여자들은 안뜰을 점거하고 ‘가방을 싸서 떠나라’고 외쳤다.” 이주민들에게 우호적인 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어 가지만, 기사는 끝내 신문에 나오지 않는다. 견디다 못한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남은 남자는 쫓기듯 그 집을 떠나 지하도로 거처를 옮긴다.

“나는 평생 나 자신을 침입자나 행인으로 느껴왔다는 걸 깨달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내 자리가 없었고, 이제는 가족도 가까이 없었다.”

‘택배 수취’의 주인공인 이민자 소녀의 경험도 비슷하다. 일주일에 몇 번 와서 빨래와 청소를 하는 소녀에게 주인 아주머니는 말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옷은 그만 입어. 너무 덥잖아. 넌 다리가 예뻐. 여기선 아무도 네게 뭐라 안 해.” 주인 아주머니가 물려준 흰색 물방울무늬 치마를 입고 외출한 소녀를 향해 오토바이에 탄 소년들은 이렇게 소리친다. “가서 네 다리나 닦아.” 그들이 공격적 언사와 함께 쏘아 댄 공기총에 맞아 소녀는 응급실에 실려가지만, 사촌은 “우리가 경찰과 얽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신고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펜션 관리인이나 가사도우미, 임시직 학생 돌보미, 헌책방 점원(‘밝은 집’) 같은 허드레 일을 하는 이들만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재회’의 주인공인 교수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친구의 단골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교묘한 차별과 배제의 언사에 맞닥뜨린다. 식당 주인은 “흑갈색 머리 여성분에게는 무엇을 가져다 드릴까요?”라며 굳이 머리 색을 부각시키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는 주인집 어린 소녀가 일부러 발을 뻗고 길을 막는가 하면 “다른 아줌마는 싫어”라며 천진난만하게 차별과 증오의 말을 내뱉는다.

이주민들에게 우호적인 듯 보이는 이들에게도 문제는 없지 않다. ‘재회’의 친구는 교수가 받은 모욕과 증오에 공감하는 대신 상황을 무마하려고만 한다. ‘택배 수취’ 속 주인 아주머니의 선의는 파괴적이고 절망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쪽지’의 주인공은 학교 일자리를 주선해준 교사에게 상담을 청하는데, 그 교사인즉 쌍둥이가 학교에 다닐 때 다른 아이들이 쌍둥이를 놀린다는 사실을 알아챈 유일한 교사였다. 그런데도 쪽지에 관해 알게 된 그 교사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그냥 내버려두세요. (…) 쪽지가 뭐가 중요한가요?” 이런 것은 위로나 공감이 아니라 무관심과 무책임, 방조에 가까운 태도라 해야 할 것이다.

소개한 작품들에서는 이주민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작가의 공감과 분노가 느껴진다. 문학에서 정치색이나 목적론적 접근에 거리를 두었던 라히리가 이번 작품에서는 마침내 문학과 정치를 결합했다고 영국 신문 가디언은 지난주에 썼다. 작가 자신이 번역에 참여해서 한국어판과 동시에 나온 영어판 소설집 서평기사에서였다.

‘로마 이야기’에는 이주민들과 주변 사람들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20년 후에는 이런 사람들 천지일 거요”라 개탄하는 노신사가 있는가 하면(‘밝은 집’), 불법 이주민들을 돕고자 해상 활동을 벌이는 딸도 있다(‘단테 알리기에리’). 이렇게 모순적인 로마를 두고 한 등장인물은 탄식하듯 말한다. “참 엿 같은 도시야.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빛과 어둠이 교차하고 선과 악이 공존하는 도시가 로마만은 아닐 것이고, 로마를 서울로 바꿔 놓아도 이 책 속의 많은 이야기들은 여전히 유효할 테다. 마지막 수록작 ‘단테 알리기에리’의 한 대목이 책 전체의 주제처럼 읽힌다.

“로마는 여전히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흔들린다. 부서지고, 잘못되고, 상처받고, 버려지고, 죽은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나는 연결된 실을 자를 수가 없다.”

최재봉 선임기자

‘로마 이야기’의 작가 줌파 라히리. 마음산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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