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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키드’ 표선여자축구단…내 나이 육십, 한 명 정도는 제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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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9일 전주시 한옥마을배 전국 여자 축구대회에 참여한 표선여자축구단 단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해정 제공 25일 저녁 6시 제주 서귀포 표선생활체육관 야외 인조잔...

지난 9월 9일 전주시 한옥마을배 전국 여자 축구대회에 참여한 표선여자축구단 단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해정 제공
25일 저녁 6시 제주 서귀포 표선생활체육관 야외 인조잔디 구장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운동장 불이 ‘반짝’하고 켜지더니, 까만 운동복에 털모자와 장갑을 갖춰 쓴 여성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바닷바람이 중간산 지역까지 불어와 추위가 상당했지만, ‘표선여자축구단’ 단원 일곱 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둥글게 둘러 서 제자리뛰기부터 앞뒤로 뛰기, 좌우로 뛰기 등을 하며 간단히 몸을 풀었다. 누군가 “팔다리를 이렇게 길게 늘이며 스트레칭을 하는 게 배변 활동에 좋단다”라고 말하자 다른 단원들이 다 같이 ‘꺄르르’ 웃었다.

강아주(31) 코치의 지도 아래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됐다. “패스를 너무 짧게 주면 안 돼요.” “인사이드(발의 안쪽)로 줘야죠.” “공이 오면 멈췄다 보내지 말고 바로 보내세요.” “패스받을 사람 이름을 꼭 부르세요.” 패스 연습이 끝나자 날아오는 공을 몸으로 받아 원하는 위치에 떨어뜨리는 기술인 ‘트래핑’ 연습이 이어졌다. 단원들은 익숙하게 머리, 가슴, 무릎 등 신체 여러 부위를 번갈아 써 가며 공을 주고받았다. 머리로 공을 받아내던 노영미(35) 씨가 “이러다 뇌세포 300개는 까지(사라지)겠어!”라고 하자 옆에서 가슴으로 공을 받던 김금자(60) 씨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공을 아무 생각 없이 맞으면 뇌세포가 까지지만, (훈련) 의도를 갖고 일부러 맞으면 안 까져!”

표선여자축구단 김해정, 노영미 씨가 25일 제주 서귀포 표선생활체육관 야외구장에서 몸을 이용해 공을 주고받는 훈련을 하고 있다.
표선여자축구단 단원들이 25일 저녁 제주 서귀포 표선생활체육관 야외구장에서 훈련 뒤 마무리 운동을 하고 있다.
표선여자축구단은 2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자랑한다. 20대부터 60대까지, 나이도, 하는 일도 다양한 20여명이 매주 월요일과 토요일 두 번씩 모여 공을 찬다. 창단 멤버인 김금자(60) 씨는 “원래는 도민체육대회가 열리면 주부들은 피구 대회 말고는 참여할 수 있는 경기가 거의 없었는데, 2002년 월드컵을 보면서 ‘저렇게 재밌는 걸 우리라고 못 할 이유 있냐’며 모여 공을 차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김 씨와 마찬가지로 창단 때부터 뛴 고문자(60) 씨가 이어 말했다. “처음엔 패스도, 킥도, 경기 규칙도 아무것도 몰라서 열한 명이 모두 공만 보고 쫓아다녔어요. 각자 집안일, 농사일을 하다가 연습 시간이 되면 밭일하던 복장 그대로 모여서 공을 찼죠. 30대에 손에 류머티스 관절염이 와 일찍부터 고생을 했는데, 공을 차기 시작하니 언제 아팠냐는 듯 싹 나았어요.”

단원들은 “운동장에서 기른 체력이 마음까지 단단하게 만들어 줬다”고 입을 모았다. 오순옥(53) 씨는 “처음엔 운동장 한 바퀴 뛰는 것도 어려웠는데 이젠 거뜬하다. 이전에는 밭일을 하고 나면 진이 다 빠져서 집에 누워있기 바빴는데, 여기 와서 땀을 한 번 잔뜩 빼고 나면 신경질도 안 내게 되고 나오는 에너지가 달라지니 가족들이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입단해 지금은 회장을 맡고 있는 김해정(53) 씨도 “집안일만 할 때는 아이들에게 집착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축구를 시작한 뒤로는 그런 게 사라졌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10일 대전광역시장기 전국 여자 축구대회에 참여한 표선여자축구단 단원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다. 김해정 제공
열한 명 선수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려 소통하다 보면, 나이나 배경이 서로 달라 생기는 차이도 자연스레 좁혀진다. 노영미 씨는 “4년 전 대구에서 하던 태권도장을 정리하고 제주도에 내려왔는데, 처음엔 제주도 방언과 문화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패스를 한 번 잘못 받으면 토박이 언니들 입에서 거친 사투리가 쏟아지다 보니 이제는 적어도 귀는 뜨였다”며 웃었다. 김해정 씨는 “자식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 내 아이들 속마음도 이렇겠구나’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푸른 잔디는 누군가에게 어릴 적 못 다 펼친 꿈을 이루는 길이 되기도 했다. 초등학생 때까지 축구를 하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만둬야 했던 양지현(26)씨는 ‘이제라도 축구를 계속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2년여 전 지인 소개로 표선여자축구단 문을 두드렸다. “축구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아 있었는데 다시 공을 차기 시작하니 너무 좋았다”는 양 씨는 강아주 코치의 제안으로 지난해 축구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해, 지금은 유소년 선수들을 가르치는 일을 전업으로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0일 대전광역시장기 전국 여자 축구대회에 참여한 표선여자축구단 단원들이 경기에 몰두해 있다. 김해정 제공
공을 차며 보낸 시간이 마냥 기쁜 장면들로만 채워져 있는 건 아니다. 지금이야 운동을 즐기는 여성의 모습이 더는 낯설지 않지만, 20년 전에는 ‘여자가 무슨 축구냐’는 시선이 집 안팎에서 쏟아졌다. 김금자·고문자 씨는 “운동장에 우리끼리 모여 있으면 ‘저 뚱뚱한 여자들이 뭐 하는 거냐’ 하고 대놓고 뒷말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축구 하러 가겠다’고 하면 남편이 ‘바쁜데 어딜 가냐’고 해서 싸우는 일도 잦았지만 지금은 모두 자연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김해정 씨는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이후 여성 풋살 인구가 크게 늘긴 했지만, 경기 시간이 더 길고 인원도 두 배 넘게 필요한 축구를 즐기는 여성들은 여전히 적은 편에 속한다. 20여년 창단 때나 지금이나 실력이 비슷한 연습 상대를 구하기가 어려워, 남자 초등학생 또는 60대 이상 남성들로 구성된 팀들을 수소문해 친선 경기를 치르며 실전 감각을 기른다”면서, “생활 속에서 축구를 즐기는 여성들이 지금보다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서귀포/정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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