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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냐?” 면접 때 묻고…입사 뒤엔 자른다

Summary

전국여성노동조합과 한국여성민우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지난달 28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 위치한 넥슨코리아 사옥 앞에서 남초 사이트 이용자들이 제기한 ‘집게손가락’ 논란을 수용...

전국여성노동조합과 한국여성민우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지난달 28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 위치한 넥슨코리아 사옥 앞에서 남초 사이트 이용자들이 제기한 ‘집게손가락’ 논란을 수용한 넥슨을 규탄하는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제공

2016년 7월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 성우 교체 사건’이 촉발한 ‘페미니즘 사상 검증’이 2023년 12월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채용 면접 과정에서부터 시작되는 ‘너도 페미냐’는 질문에 여성 노동자들이 직접적으로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소비자의 권리’, ‘기업의 생존’이라는 논리가 이런 페미니즘 사상 검증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3회에 걸쳐 게임업계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며,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페미 걸러내기’의 문제점을 짚어본다.

“ㄱ씨 트위터(현 ‘엑스’)를 봤는데 거기 있는 글들이 꽤 이슈가 되겠어요. 우리 회사에서 일하게 되면 여파가 걱정되네요. 향후 이런 점이 문제가 되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신가요?”

일러스트레이터 ㄱ씨는 지난해 한 게임개발사 면접 도중 대표이사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회사 쪽에선 이미 ㄱ씨의 트위터 내용을 쭈욱 살펴본 듯 했다. 대표는 “우리 회사 소속 직원이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에 페미니즘에 관한 발언을 했다가 유저들로부터 ‘게임에 페미 묻었다’는 클레임이 들어온 적이 있다”며 “ㄱ씨도 그런 리스크가 있을까봐 우려가 돼 질문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트위터에는 ㄱ씨가 겪은 성차별 경험과 페미니즘 관점에서 작품을 본 뒤 느낀 감상을 올린 글, 여성인권단체의 글을 리트위트한 내용을 올린 게 고작이다. 그런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면접 자리에 나온 구직자 처지에 대표에게 항의하기는 쉽지 않았다. “발언에 주의하고, 회사 가이드라인에 따르겠습니다. 트위터 계정도 정리하겠습니다.” ㄱ씨는 이렇게 답변했다. 면접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내가 페미니스트라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서 내 팔자를 스스로 꼰 건가’, ‘지금이라도 에스엔에스 계정을 없애야 하나’ 생각이 들어 한껏 위축됐어요.” ㄱ씨는 이 찝찝한 ‘압박 면접’ 이후 다시는 게임업계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게임업계의 ‘페미 사상 검증’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남초 사이트에서 ‘남자를 혐오하는 페미니스트’로 일단 찍히면 회사로부터 해고 등 문책을 받는 게 공식처럼 자리잡아가는가 하면, 채용 과정에서 대놓고 사상 검증이 이뤄지면서 게임 업계 종사자들의 생계마저 위협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다수 누리꾼의 사상 검증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버티다가, 결국 업계를 떠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채용 면접부터 시작되는 ‘사상 검증’

게임 개발자 ㄴ씨도 2019년 대형 게임업체 면접 과정에서 ‘사상 검증’을 당했다. 10년 이상 업계에서 일해온 ㄴ씨에게 면접관은 다짜고짜 “페미니스트냐”고 물었다. “면접관님이 생각하는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람이냐”고 ㄴ씨의 되물음에 “대부분의 페미니스트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남성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ㄴ씨는 “그렇다면 저는 면접관님이 말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불쾌한 것은 “같은 날 면접을 본 남성 지원자 누구도 이런 질문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ㄴ씨는 면접을 통과했지만 이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회사 관계자로부터 “넥슨 게임 클로저스 사건’도 있고 해서, 윗분들이 여성 개발자를 뽑고 싶지 않아 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면접 때 ‘페미냐’고 묻는 게 비단 이 회사만의 일은 아니었다. ㄴ씨는 “다른 대형 회사 3곳에서 면접을 봤는데, 전부 사상 검증 면접을 했다”고 말했다. ㄴ씨는 “면접 때 사상 사상 검증을 하지 않은 회사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유일했다”고 말했다.

업체 1위 넥슨이 만든 ‘나쁜 선례’

인터뷰에 참여한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2016년 7월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 성우 교체 사건’을 계기로 페미 사상 검증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았다. 클로저스의 신규 캐릭터 티나의 목소리 연기를 맡은 성우 김자연씨가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하지 않아’(Girls Do Not Need A Prin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남성 이용자들이 ‘남혐’이라고 항의하자, 넥슨이 즉각 성우를 교체한 사건이다. ㄱ씨는 “이전에도 온라인에서 창작자를 향한 일부 유저들의 공격이 있었지만, 회사가 이런 공격 때문에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 교체 당시 넥슨코리아의 개발법인이었던 데브캣스튜디오의 개발책임자 김주복씨가 ‘업계 선도 위치에 있는 회사가 이런 논리를 인정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피해자를) 작업물에서 배제하고 심지어 피해자가 사과문을 올리게까지 만든 건 업계에 대단히 나쁜 선례를 만든 것’이라는 비판 글을 에스엔에스에 올리기도 했지만, 이런 의견은 묵살됐다. 오히려 넥슨의 대응을 비판한 게임캐스터·성우 등이 연달아 일자리를 잃었다. 업계에선 ‘일단 페미 검증에 걸리면 끝장’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전국여성노동조합이 콘텐츠 업계의 사상검증 피해 사례를 파악한 결과, 2016년부터 올해 12월 초까지 ‘페미’라는 이유로 해고 등을 겪었다는 사례 등 83건에 달한다. ‘페미인 게 뭐가 문제냐’며 맞붙어봐야 승산이 없다는 분위기 속에, 이슈화되지 않은 더 많은 문제들이 잠재해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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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에게 책임 떠넘기는 업체들

2016년 넥슨의 성우 교체 사건 이후, 게임사들은 남초 사이트에서 페미 사상 논란이 제기될 때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며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꼬리자르기’ 방식으로 ‘마녀사냥’에 가담해온 셈이다. 그 사이, 노동자들은 얼굴을 알 수 없는 다수 누리꾼의 사상 검증에 고통받다가 결국 업계를 떠나기도 한다.

2018년 ‘한국남성 비하’ 논란에 휘말렸던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를 지지하는 글을 올렸다가, 남초 사이트에서 집중 포화를 맞았던 남성 프리랜서 게임 시나리오 작가 ㄷ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ㄷ씨의 신상이 남초사이트에 공개되자, 몇 차례 협업을 했던 게임회사 대표로부터 “당신이 올린 글로 인해 우리도 피해를 볼 수 있으니 계정을 삭제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대표는 “이 논란에서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상관 없다”며 “이건 전쟁이고, 우리는 밥그릇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 회사와는 구두로나마 앞으로 ‘같이 게임 한번 만들자’는 얘기가 오가던 사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장 계약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 사이에 그런 요구까지 한 걸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ㄷ씨로서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ㄷ씨는 이 사건 이후 1년 넘게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회사에선 더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 무렵, 입사가 예정돼 있던 다른 회사의 처신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업체 쪽에선 ㄷ씨의 입사를 취소하지 않았지만 조건으로 ‘에스엔에스 금지’를 요구했다. 그리고 ㄷ씨의 참여가 알려지면 회사가 피해를 볼 수 있다며 작품에 ㄷ씨 이름을 공개하지 말자고 했다. “내 작업물이지만, 내가 했다는 어떤 흔적도 없게 된 것”이라고 ㄷ씨는 말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ㄹ씨는 “(남자인 내가) ‘한남’이라는 단어를 리트위트했다는 이유로, 래디컬 패미니스트로 찍혀 온라인에서 괴롭힘을 당했다”며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진행 중이던 작업이 돌연 중단됐다”고 말했다. ㄹ씨는 “이후 해당 업체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벌어진 넥슨의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홍보영상 속 ‘집게손가락’ 논란에 대해 의견을 표명했는데 “몇 시간 뒤 넥슨에 있는 지인들로부터 회사 쪽에서 ‘ㄹ의 에스엔에스 팔로잉을 해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얘기를 전해듣기도 했다”고 말했다.

10년 경력의 게임 일러스트레이터 ㅁ씨도 페미 사상 검증을 당한 일러스트레이터의 입장문을 에스엔에스에 공유했다가 3년 동안 일감이 끊겼다. ㅁ씨는 “함께 일하던 업체가 구체적인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리니 방도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체’까지 바꿔가며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으나 결국 게임업계를 떠났다.

남초 커뮤니티와 닮아가는 게임업계

게임업계 안에서 ‘논란 방어’ 수준을 넘어 남초 커뮤니티와 동화되는 분위기마저 나타나는 듯하다. 일러스트레이터 작가들이 익명으로 활동하는 단톡방에선 일부 게임업계 관계자들이 “저런 일(집게손가락 논란 등)이 자꾸 생기니까 게임회사에서도 사람 대신 인공지능(AI)을 쓰자고 하는 것 아니냐”며 여성들을 비난하는 얘기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ㄱ씨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런 손가락 모양을 어떻게 하나도 표현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냐. 그건 마녀사냥이다”라고 맞받았다가, 단톡방에서 강제퇴장 당했다. ㄱ씨가 단톡방에서 한 말은 고스란히 갈무리돼 남초 사이트에 올라왔다. 그 글에는 ‘우동사리 터진 ×’ ‘미친×’ ‘빡대갈 ×’ 등의 욕설 댓글이 달렸다.

넥슨의 성우 계약 해지 사건 당시, ‘남혐’ 검증에 나섰던 누리꾼들은 김자연씨를 옹호하는 글을 올린 사람은 물론, 그 글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까지 찾아다니며 공격을 했다. ㄴ씨는 당시 한 달 가까이 여성이 난도질 당하는 사진 등을 댓글이나 디엠(DM)으로 받기도 했다. 에스엔에스 개인 이력 정보를 뒤져 게임업계에 종사하는 게 드러나면 회사에 ‘페미니 자르라’고 신고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ㄴ씨는 “낯선 사람들이 행사장까지 찾아와 ‘게임 개발자냐’ 묻는 일을 겪은 지인도 있었다”며 “두려워서 주변 동료들도 에스엔에스 계정을 삭제했다”고 말했다. ㄴ씨는 그런데도 “회사 쪽이 공격받는 직원들을 돕는 상황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덧붙였다. “오히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조직 안에서조차 여성 직원을 공격하는 일들이 많아져, 개발자들의 스트레스가 커지고 있다”고도 했다.

눈에 띄는 건, 페미니즘을 옹호한 사람이 남성으로 드러나면 남혐 검증 누리꾼들의 공격의 화력이 크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남성 일러스트레이터 ㅂ씨는 “오프라인 행사장까지 저를 찾아온 남성 유저들로부터 남초 커뮤니티에서 외모 평가까지 당했다”며 “그런데 내가 남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노골적인 괴롭힘이 90% 정도 사그라졌다”고 말했다.

ㄷ씨도 “내가 여성이었다면 (저를 향한 공격이) 더 심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오프라인 행사장 등에 갈 때마다 ‘날 알아본 누군가가 면전에서 욕을 하거나, 그 이상의 실제적 위협을 가할까봐 두려운데, 여성들이라면 (두려움이 더 할 것이라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김민성 한국게임소비자협회장은 “일부 극단적이고 혐오적인 게임 이용자들 때문에 게임 업계 종사자들의 노동권뿐만 아니라 여성 인권까지 침해당하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다”며 “게임업체들은 올바른 소비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폭력을 스포츠 삼는 악성 이용자들에게서 노동자와 기업을 지킬 수 있는 제도적인 대책이 시급하다”고 호소했다.

채윤태 기자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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