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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모르는 이들과 걷기…혼자 있어 충전하고 함께하며 주고받기

Summary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지난달 초에 제주도에 갔습니다.​ 매년 11월 첫주 목·금·토요일 3일 동안 열리는 ‘제주올레 걷기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지요. 올레길 전체 27개 코스 중...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지난달 초에 제주도에 갔습니다.​ 매년 11월 첫주 목·금·토요일 3일 동안 열리는 ‘제주올레 걷기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지요. 올레길 전체 27개 코스 중 그해에 정한 3개 코스를 참가자들과 함께 걷습니다. 13회째인 올해엔 사전 등록한 참가자가 23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각 코스가 지나가는 마을의 사람들이 점심을 준비하고 음식을 나릅니다. 자원봉사자 수백명은 교통을 정리하고 코스를 안내합니다. 이들뿐일까요. 코스 중간중간에서 다양한 공연을 펼치는 아티스트들과 합창단원까지 하면 3천명 이상이 축제를 함께했습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섞여서 같이 걷고 일본·몽골·미국·캐나다 등에서 온 수백명의 외국인도 격의 없이 어울린 축제였습니다.

떼를 지어 걷는 일…굳이?

저는 첫날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나머지 이틀 동안 두 코스의 일부 구간만 걸었습니다. 축제 둘째 날, 코스 중간 한 포구에서 시작해서 오름을 거쳐서 차귀도가 보이는 바다 절벽 길 구간을 걸었습니다. 함께 출발한 지인들과 가까이서 걷다가 차차 서로 떨어져서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나란히 또 앞뒤로 섞여서 걷는데 한결같이 그들 모두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표정이 밝고 환하고 명랑합니다. 대화도 상쾌했습니다. 발개진 얼굴로 걸으며 얻은 기쁨과 치유 경험을 주저 없이 나눕니다. 도심에서 복닥거리다가 자연 속에서 함께하면 모두 순수해지고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인의 추천으로 처음 걸으러 왔다는 한 중견기업 대표는 일에서 생긴 온갖 부담과 무게를 다 비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만 갖고 왔는데, 걸으며 비워진 자리에 싱싱한 기운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역시 비워야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걷다가 제 지인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는데도 반가웠습니다. 다음날은 오름과 숲길을 걸었습니다. 함께한 길동무들이 저더러 체력이 좋아졌다고 말합니다. 좋아진 기분으로 한참을 걸어 포구에 도착해 근처 한 카페에 잠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남녀 한 커플이 따라 들어오는데 언뜻 보니 저와 아주 가까운 친구들이었습니다. “아니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악수하고 서로를 안고 소리치면서 반가워했습니다. 차를 같이 마시고 한참을 얘기 나누고 다음날 점심을 같이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숲, 오름, 바닷가 길에서 낯모르는 수많은 사람과 같이 걸으면서 얻는 기운도 좋고, 친한 사람을 뜻밖에 만나 만끽하는 기쁨도 참 컸습니다.

과거에 저는 혼자 생각에 잠겨서 걷거나 한두명 지인과 같이 걸었지, 전혀 모르는 수백명의 사람들과 섞여서 걷는 것을 그리 내켜 하지 않았습니다. ‘걷고 싶으면 혼자 알아서 걸으면 됐지, 왜 구태여 이렇게 수많은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걸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었지요. 현직에 있을 때 저는 연휴만 되면 도심을 떠나, 사람들을 떠나 등산을 하거나 호젓하게 올레길을 걸었는데 그것이 제게는 디톡스였고 또 테라피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 걷기축제에서 낯 모르는 수많은 사람과 섞여서 걸으면서 묘한 체험을 했습니다. 혼자 혹은 몇명과 걸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역동하는 에너지를 처음으로 느꼈지요. 바다를 배경으로 둑길을 걷는 구간이었는데 줄지어 걷는 수백명의 무리에서 나오는 활활거리는 기운이 제게 강렬하게 전해졌습니다. 혼자 걷는 것도, 함께 무리로 걷는 것도 필요하구나. 거기서 각각 또 다른 생명에너지를 얻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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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있기 위해 혼자 있기

최근 한 친구가 전해준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제법 긴 여행을 어떤 친구와 했는데 며칠은 같이, 또 며칠은 따로 여행하다가 또 만나 여행했다는 겁니다. 그 여행 기간에 한번도 싸우지 않았다면서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 남편과 열흘 동안 24시간 붙어서 여행했는데 수차례나 다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누구나 종종 혼자 있을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혼자 있음으로써 자기 자신과 만나고 또 자기 영혼을 돌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근원적인 생명에너지를 충전받고 그 기운을 남과 함께 주고받으면서 잘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50대 중반 이후부터 북한산 중턱의 한 주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족이 모두 외국에 살고 있어서 저는 주로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단절되어 있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페이스톡 덕분에 자식들, 손주들을 영상으로 자주 봅니다. 간혹 과거 회사 동료들을 만나면 제게 “왜 당신은 은둔하고 사느냐?”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운이 없어서 그래”라고 답하고 웃고 말지만, 실은 저는 주변에 마음을 나누는 좋은 친구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혼자 지내다 보면 가장 외로움을 느낄 때는 설이나 추석 명절 때인 것 같습니다. 10여년 전 처음 올레길을 걷게 된 이후 한동안은 추석이나 설 명절 연휴가 되면 제주도에 내려가서 지인 가족과 같이 지내기도 했습니다.

연말연시도 그런 시기입니다. 이제 곧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를 맞게 됩니다. 마무리되는 올 한 해에 감사하고 다가오는 새해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가 된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은 ‘지금, 여기’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머무를 수 있으면 하루하루가 새롭고 그날그날이 기대로 가득 찰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새해는 더욱 가슴 뛰는 희망이지요. 프랑스 파리에 사는 큰딸이 연말연시를 같이 보내려고 곧 옵니다. 함께할 기대에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우리는 모두 같이 있기 위해서 혼자 있는 것이지요.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한 뒤 삶의 방향을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로 바꿨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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