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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도 페미도 잘못 없는데…‘우연히 살아남았다’ 그 말 절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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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h730’을 쳐보세요. ‘나는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당시 거리를...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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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당시 거리를 가득 채운 여성들이 외쳤던 구호다. 김영주(20대·가명)씨는 며칠 전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만해도 이 구호의 의미를 절감하진 못했다.

그 일은 김씨가 경상남도 진주시의 한 편의점에서 일한 지 3개월쯤 되던 날 벌어졌다. 처음으로 지각한 걸 제외하면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김씨의 평범한 일상은 ㄱ씨가 편의점 문을 발로 거칠게 차고 들어오면서 깨졌다. 상기된 얼굴로 매장 안으로 들어온 ㄱ씨는 진열대에 있는 상품들을 손으로 툭툭치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물건을 다시 올려달라”는 김씨의 말에, “네가 먼저 시작했다”는 말이 돌아왔다. ㄱ씨는 아이스크림을 집어 던지고 카운터를 발로 찼다. 신고를 하려고 꺼내든 휴대전화를 낚아채갔다. “네 생각대로 안 될 걸.” ㄱ씨는 김씨의 휴대전화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놀란 김씨가 카운터에서 나와 전자레인지에 손을 뻗는 순간, 겪어보지 못한 폭행이 시작됐다.

“여자가 머리가 왜 짧아? 페미니스트 아냐?” 다짜고짜 얼굴에 주먹이 날아오고, 복부에 발길질이 쏟아졌다. ㄱ씨는 곁에서 막아서던 50대 남성 손님에게도 주먹과 발길질 세례를 퍼부었다. “왜 남자가 남자를 돕지 않느냐”고 했다.

김씨는 신경외과에 입원해 정형외과와 치과, 이비인후과 진료를 함께 받아야 했다. 인대가 늘어나 왼쪽 팔엔 깁스를 했고, 앞니 세 개가 흔들렸다. 이명이 생겼고, 특히 왼쪽 청력 손실이 심해 전화 받기 어려울 정도였다. 김씨를 도우려던 50대 손님도 어깨와 이마, 코, 오른손 부위 등에 골절상을 입는 등 크게 다쳤다고 했다.

“(강남역 사건 때만 해도) 누군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나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는 내가 지킬 수 있다고 여기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 일을 겪은 뒤로는 ‘내가 살아남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돼요.”

하루 아침에 ‘진주 편의점 숏컷 여성 폭행 사건’의 피해자가 된 김씨는 지난 22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덩치 큰 남성이었어도 때렸을까요.” 사건이 발생한 지 3주가 지났지만, 김씨는 아직도 ㄱ씨가 왜 그렇게 자신을 때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때때로 짧은 머리 때문에 ‘남자냐, 여자냐’ 하는 질문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머리 길이 때문에 맞을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3년 전엔 등까지 내려오도록 길게 머리를 기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불편하기도 하고, 저에겐 짧은 머리가 더 잘 어울려 대체로 짧은 머리를 유지한 것 뿐이에요. 심지어 지난 5월엔 더워서 머리를 더 짧게 잘랐다가 지금은 기르는 중이었는데…” 그는 “짧든 길든, 취향에 따른 스타일인데 왜 비난하는지 모르겠다”며 “설령 페미니스트라고 하더라도 왜 공격을 당해야하냐”고 따지듯 물었다.

김씨는 그날 이후 거의 매일 죽는 꿈을 꾼다. 어떤 날은 차 사고로, 어떤 날은 흉기에 찔려 죽는 꿈을 꾼다. “모든 종류의 죽는 꿈을 꾼다. 죽고 끝나는 게 아니라 꿈에서 죽고 또 죽는다”고 했다. 김씨는 사건 이후 공공장소나 카페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도 어지간하면 피하게 된다. “원래 눈치 보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누군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고, 해코지할 것 같아 불안해서”다. 이 때문에 사건 이후 편의점 일도 그만뒀다. 김씨는 “여성혐오 범죄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데, 여성가족부가 여성폭력 예방 및 피해자 지원 예산을 삭감했다는 기사를 봤다”며 “예산이 줄어들면 저 같은 피해자들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자꾸만 움추려드는 김씨를 일으켜 세우는 건 ‘연대’의 손길이다. 김씨의 일이 알려진 뒤 수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짧은 머리 사진에 ‘여성_숏컷_캠페인’이란 태그를 달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하고 있다. 또 ‘가해 남성의 신상을 공개하고 엄벌하라’는 국민동의 청원에 지난 22일까지 5만명이 함께 했다. 김씨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현실 같지 않고, 마음이 힘들어 외면하고만 싶었는데, 내가 외면하는 동안 공감과 연대를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지금 바라는 건 “카페나 공공장소에 갈 때, 버스를 탈 때 불안해 하지 않을 정도로 몸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가해자가 엄벌에 처해지는 것”이다. 아울러 “머리카락은 지금처럼 짧게 유지할 계획”이다. “(그날) 머리카락이 길었다면 또 다른 이유로 폭행당하지 않았을까요.” 김씨는 “이게 머리카락을 기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고 힘주어 말했다.

장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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