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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성별 변경시 수술 의무화’ 조항을 위헌으로 본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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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재판소가 지난달 25일 성소수자인 트랜스젠더의 기본권을 일부 보장하는 결정을 했다. ‘트랜스젠더가 생식 능력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법원에 성별정정 청구를 가능’하도록 한...

일본 최고재판소가 지난달 25일 성소수자인 트랜스젠더의 기본권을 일부 보장하는 결정을 했다. ‘트랜스젠더가 생식 능력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법원에 성별정정 청구를 가능’하도록 한 현행 법률 조항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우리나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사법기관이다. 1947년 설립 이래, 특정 법률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사례가 고작 10건(2015년 기준) 정도에 불과할 만큼 ‘보수적인’ 결정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11월20일)을 앞두고 인권법학회는 일본 최고재판소의 결정 내용을 살펴보고, 향후 과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난 16일 줌(ZOOM)을 활용한 온라인 방식으로 인권법 포럼을 개최했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은 전 세계에서 성별 이분법에 기인한 혐오와 차별에 희생당한 트랜스젠더들을 추모하고 이들의 존엄과 권리를 되새기는 날이다. 신체적으로 드러나는 성별과 본인이 인식하는 성별이 다르다고 느끼는 트랜스젠더들은 살면서 여러 차별을 겪고 있지만, 특히 성별정정(또는 성별변경) 과정에서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와 유엔여성기구, 세계보건기구 등 국제기구들은 2014년 공동성명을 통해 ‘성별정정을 위해 생식능력 상실(불임)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 결정권과 인간 존엄성 존중에 위배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기류 속에서, 2000년대 중반 이후 유럽연합 회원국(총 27개국) 가운데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20개국을 비롯해 미국 내 20여개 주가 성별변경 요건으로 생식기관 제거 및 외부성기 성형 수술을 요구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일본 등은 여전히 법률에 ‘성기 성형 수술’ 등의 요건을 두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각급 법원은 대법원 예규인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허가신청 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에 근거해 성별정정 신청을 한 사람에게 외부성기 성형 수술 및 생식능력 제거 확인서 제출을 요구하고 있다. ‘참고사항’이지만, 다수의 법원은 이를 필수 자료처럼 요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법원에서 수술 없이 성별이 정정된 결정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로 인해 성별정정을 원하는 트랜스젠더에게 수술을 요구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상당한 건강 및 경제적 부담을 지게 하고, 국제인권규범이 보장하는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나왔다.

이런 가운데, 일본 최고재판소는 지난달 25일 ‘성동일성장해자(일본에서 트랜스젠더를 가리키는 말)의 성별 취급의 특례에 관한 법률’(이하 특례법) 일부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2004년 시행된 특례법은 제3조 제1항에서 성동일성장해자의 성별정정 요건을 5가지(1~5호)로 정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가정재판소에 성별변경 청구를 하려는 사람에게 난소 또는 정소와 같은 생식선(생식샘)이 없을 것 또는 생식선 기능이 영속적으로 결여된 상태에 있을 것’을 요구하는 4호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이다.

4호 조항은 특례법 제정 당시 성별변경 전에 자녀를 가진 사람이 성별정정을 할 경우, 부모와 자녀관계 등에 문제가 발생해 사회에 혼란이 발생할 수 있고, 오랫동안 생물학적 성별(이분법)에 기초해 여성과 남성을 구별해온 이상 (성별정정으로) 급격한 변화를 피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마련됐다.

하지만 일본 최고재판소는 해당 조항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성동일성장해를 가진 사람은 사회 전체에 비추어볼 때 소수이고, 성별변경을 하려는 사람 중에는 스스로의 생물학적 성별에 따른 신체적 특징에 대한 불쾌감(디스포리아) 등을 해소하기 위한 치료로서 생식선 제거 수술을 받는 사람도 상당수 존재한다”며 “타고난 생식기능에 따라 아이를 갖는 것 자체에 저항감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다고 보이는 점에 비추어 보면, 생식선 제거 수술을 받지 않고 성별변경 심판을 받는 사람이 자녀를 갖는 것으로 인해 부모와 자식관계 등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이어 “특례법 시행 후 19년이 경과해 지금까지 성별정정 심판을 받은 사람은 1만명을 넘어섰고, 성동일성장해를 가진 사람에 관한 이해가 넓어지고 있으며, 이들의 사회생활상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환경정비 조치 등도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뤄지고 있음에 비추어볼 때, 사회 전체에 있어 예기치 못한 급벽한 변화를 맞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이를 토대로 해당 조항이 스스로의 의사에 반해 신체에 대한 침해를 당하지 않을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제13조를 위반해 무효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건을 히로시마고등재판소로 파기환송했다.

특히 재판관 일부는 특례법 제3조 제1항 4호뿐만 아니라 5호에 대해서도 위헌 결정을 했어야 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5호는 성별정정을 하려는 사람에게 ‘외부성기 성형 수술을 요구’하는 조항이다.

미우라 마모루 재판관은 “외과적 치료는 생명 또는 신체에 대한 위험을 수반하는 강도 높은 침해에 해당한다”며 “지정된 성과 스스로의 성별 인식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갖는 고통이나 불이익은 그 존엄과 생존에 관해 광범위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민주적 절차에 있어 이런 소수자의 권리와 이익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쿠사노 코이치 재판관은 “5호 규정이 위헌인 사회가 5호 규정이 합헌인 사회와 비교할 때 조금 더 소란스러운 사회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소란스러움은 국민이 향유하는 복리를 최대화하기 위한 노력과 그 성과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승현 비온뒤무지개재단 이사장은 인권법학회 포럼에서 일본 최고재판소의 이번 위헌 결정에 대해 “국제사회를 비롯해 일본 사회에서도 성소수자에 대한 수용도가 높아진 환경 변화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본인이 인식하는 성별과 다른) 생물학적 성별로 인한 불쾌감 등의 증상은 다양하고 개별적인 것이고, 이에 따라 원하는 성별에 적합하게 자신을 바꾸고자 하는 의사에는 다양한 의사가 포함된 것이라는 방향으로 의학적인 견해가 달라진 점”을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사회적 인식은 달라지고 있는데, 특례법에서 정한 요건은 달라지지 않아 결과적으로 트랜스젠더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강도가 높아졌고 이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이번 일본 최고재판소 위헌 결정의 핵심 중 하나라는 설명이다.

이승현 이사장은 “스페인, 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 하는 것처럼 결국엔 법원이 (성별정정 여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자신의 젠더 아이덴티티(성별 정체성)를 스스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성별정정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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