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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한-일 화해와 상생의 길 보여주신 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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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자택에 봉안되어 있는 영정사진. 필자 제공 교토대 사학과 나와 1960년대부터 근대일본에서 조선의 중요성 자각 일제가 저지른 조선침략사 연구로 일본인 역사인식 바로잡으려 분...

고인의 자택에 봉안되어 있는 영정사진. 필자 제공

교토대 사학과 나와 1960년대부터
근대일본에서 조선의 중요성 자각
일제가 저지른 조선침략사 연구로
일본인 역사인식 바로잡으려 분투
일본군 사료로 일본 역사왜곡 밝혀
동학농민군 후손 만나 사죄하기도

고향 나라와 도쿄서 추모모임 준비

지난 10월 29일 저녁. 전남 나주에서는 조촐한 시민교류회가 열리고 있었다. 다음날 있을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 제막식 참석차 방한한 일본인 답사단을 환영하는 자리였다. 식순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비보가 날아들었다. 사죄비 건립추진 일본 쪽 대표 나카쓰카 아키라 교수가 폐암 투병 중 94살을 일기로 영면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1929년 오사카에서 출생한 선생은 1953년 교토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한 이래 1960년대부터 ‘근대일본에 있어서 조선문제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영면하는 날까지 오로지 일제가 자행한 조선침략사 연구를 통해 일본인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잡고자 분투한 역사가였다.

생전에 ‘일본의 양심’으로 존경받았던 선생은 1968년에 ‘청일전쟁 연구’(아오키서점)라는 첫 저서를 펴냈다. 그 머리말에서 선생은 “근대일본의 영광을 찬미하는 주장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주장인지를 밝혀, (중략) 일본의 ‘영광’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또 근대일본이 잇따라 저지른 전쟁의 근원이 무엇이며, 또한 그것이 왜 제2차 세계대전 패배라는 결과로 끝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라는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이 책 집필에 매진했다”고 썼다.

11월14일 필자가 고인의 집을 찾아 따님에게 위로 인사를 전하는 모습. 필자 제공

‘청일전쟁 연구’는 종래 “청일전쟁은 일본의 군부가 주도한 것이며, 외무성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정부는 청일전쟁에 소극적이었다”고 주장한 시노부 세이사부로(1909-1992)의 이른바 ‘이중외교론’을 1차 사료에 근거하여 논파함으로써, 청일전쟁이야말로 일본 군부‧정부 할 것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수행한 침략전쟁이었음을 밝힌 역작으로 일본 학계의 통설로 자리하고 있다.

1993년 나라여자대학을 정년퇴직한 뒤에도 선생은 여러 권의 역저를 펴냈다. 그중 하나가 ‘역사의 위조를 밝힌다’(코분켄, 1997; 한국어판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푸른역사, 2002)이다. 선생은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이 되던 1994년에 후쿠시마현립 도서관 ‘사토문고’에서 동학혁명 당시 일본군이 불법으로 경복궁을 침략한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한 ‘일청전사초안’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04년에 일 육군참모본부가 간행한 ‘메이지이십칠팔년일청전사’에 “1894년 7월 23일 새벽, 한국 병사의 발포로 응전한 우발적이며 소규모의 충돌사건”이라고 서술된 내용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밝혀냈다. 참모본부가 작성한 ‘일청전사초안’을 통해 참모본부의 공간전사(公刊戰史)가 거짓이었음을 만천하에 입증한 것이다.

1995년 7월,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소속 후루카와강당 인류학교실에서 전남 진도 출신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이 방치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진상조사차 홋카이도대학에 유학 중이던 필자는 1997년 가을에 처음으로 선생을 만났다. 그 만남을 계기로 2001년 5월 전주시에서 ‘동학농민혁명의 21세기적 의미’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선생을 초청,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 등을 안내했다.

지난 1월 필자(왼쪽 둘째) 일행이 병문안 뒤 고인(왼쪽 셋째)과 찍은 사진. 필자 제공

“저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때 받았던 감동을 일본 친구들에게 전달하여 2002년에 일본인 단체 답사팀으로는 최초로 바로 이곳, 여러분들께서 자리하고 계시는 고창의 전봉준 장군 생가와 무장읍성 등 자랑스러운 동학농민혁명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땅과 유적지를 밟을 수 있었습니다”(제7회 녹두대상 수상 기념강연, 2014년 4월25일)라고 회고한 바 있는 선생은 2006년부터 ‘한일 시민이 함께 하는, 동학농민군 전적지를 찾아가는 여행’ 답사단을 조직하여 매년 한국을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2012년에는 장서 1만5천여권을 전남 도립도서관에 무상으로 기증했고, 2014년에는 전북 고창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로부터 동학농민혁명 연구와 그 현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인 최초로 제7회 ‘녹두대상’을 수상했다.

2018년 10월,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찾았던 선생은 농민군 후손 문영식씨를 만난 자리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저의 할아버지 세대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닙니다. 3만여 명의 조선 농민이 학살되었습니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속 깊이 사죄드립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나카쓰카 선생은 진정으로 한일 간의 화해와 상생의 길을 온몸으로 열어주신 분이다.

지난 11월14일, 필자는 일본 교토부 기즈가와시에 있는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따님께 사죄비 제막식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인사와 함께 정중한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 내년 봄, 선생의 고향 나라와 도쿄에서 선생을 기리는 추모 모임이 준비되고 있다고 했다. 그 자리에도 한일 시민들이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맹수/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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