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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보다 이익’ 키신저의 레알폴리틱…말년까지 “러와 타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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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100살로 별세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2016년 때 모습. AFP 연합뉴스 1971년 7월9일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병을 이유로 결근했다. 그...

29일 100살로 별세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2016년 때 모습. AFP 연합뉴스

1971년 7월9일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병을 이유로 결근했다. 그날 그는 파키스탄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의 비밀 방중이 선도한 미-중 수교는 냉전 구도를 바꿔서 소련 붕괴를 이끈 미국의 최대 외교 성과였다.

미-중 수교와 미-소 군비 축소 등 데탕트, 베트남전쟁 종전을 주도하며 냉전 종식의 밑돌을 놓은 현대 미국의 대표적 전략가 헨리 키신저(1923∼2023)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100.

로이터 통신 등 외신들은 이날 미국 키신저가 코네티컷 자택에서 타계했다고 보도했다. 독일 태생 유대인인 키신저는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전후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전략가로 좌우 양 진영에서 찬사와 비난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세력 균형에 입각한 지정학을 무기로 한 레알폴리틱(Realpolitik, 현실정치)으로 미국 대외정책을 이끌었다. 대외정책의 핵심을 타국과의 관계에서 자국에 유리한 세력균형 확보라고 봤다. 미-중 수교는 국제 지정학의 3대 축인 미-중-소 관계를 기존의 반미 중-소 블록 체제에서 반소 미-중 연대로 바꿨다. 소련을 고립시켜 미국에 유리한 세력균형을 조성하자는 그의 외교 철학이 낳은 결정판적 사건이었다.

그는 한반도 문제에도 깊이 관여해왔다. 국무장관 시절인 1970년대 중반 유엔에서 중국과 소련이 한국을 승인하고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는 이른바 ‘교차승인’ 구상과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제안한 일이 대표적이다. 1975년 9월 유엔 총회에서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북한 및 북한의 동맹국이 대한국 관계개선 조치를 취하면, 한국과 미국도 그것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도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는 생각이 엿보인다.

1991년 탈냉전의 흐름을 타고 그가 제안했던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성사됐지만 북미, 북일 수교는 실현되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일본 납치 사건 발생 이듬해였던 1974년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이 김 전 대통령이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할 경우 받아들일 것을 주한 미국대사관에 지시했다는 사실이 1998년 공개된 미국 비밀 외교전문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1923년 5월27일 독일 바이에른에서 태어난 유대인인 그는 나치 정권 유대인 박해를 피하려는 부모와 함께 1938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가 평생 독일어 억양이 섞인 영어를 쓴 배경이다. 2차 대전에 병사로 참전해 통역과 정보 업무로 능력을 인정받은 키신저는 전역 군인들을 위한 학업 지원을 통해 하버드대에 진학했다. 정치학을 전공해 1954년에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 교수로 임용됐다. 이 박사 학위 논문이 초고인 저서 ‘복원된 세계’는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 뒤 5대 강국들의 타협과 세력 균형에 입각해 전쟁을 피한 ‘유럽의 화합’ 체제를 분석한 것이다. 이때부터 키신저는 강대국 사이의 세력 균형을 대외정책의 핵심이라고 인식했다.

키신저는 1960년대초부터 억만장자 출신으로 공화당 진보파인 넬슨 록펠러의 대선 운동에 참여해 대외정책 보좌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1968년 대선에서 승리한 닉슨에 의해 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 미-중 수교를 지지한 닉슨의 후원으로 냉전 질서를 바꾸는 외교 행보에 나섰다.

강대국 사이의 이해 조정을 우선시하고 자국 이익을 위해서는 협상과 전쟁을 마다않는 그의 냉혹한 현실주의인 레알폴리틱은 가치와 이념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에 물들었던 미국의 좌우파 모두로부터 저항과 비난을 받았다. 우파들은 그가 공산주의 정권과 화해를 추구한다고 의심했고, 좌파들은 그가 제3세계 국가에서 쿠데타 및 비인도적 공작을 서슴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키신저는 소련과의 데탕트, 중국과의 수교를 추구하면서도,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에서는 잔인한 반공 캠페인을 주도했다. 1970년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친미 군부쿠데타 및 1975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 지원, 베트남전쟁 때 미국이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대규모 폭격 등이 대표적이다.

1973년 2월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저우언라이 총리가 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하지만, 그의 외교 경력의 뼈대는 협상과 막후 조정이었다. 미-중 접근을 통해서 소련을 압박해, 군비축소 등 데탕트를 이끌었다. 중동에서는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을 지원해 아랍권의 석유 금수 조처를 촉발하기도 했으나, 그 이후 중동평화협상을 통해서 이집트 등 친소 아랍 국가들의 친미화를 이끌었다. 베트남전 종전 협상인 파리 평화협상을 성공시킨 공로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협상 상대였던 베트남의 레둑토는 베트남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벨평화상 수상을 거절했고, 키신저도 2년 뒤 남베트남이 몰락하자 노벨상 반환을 제안하기도 했다.

키신저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미국 대외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컨설팅 회사를 만들어, 각국 정부와 지도자를 자문해 큰돈을 벌었다. 90살이 넘어서도 ‘세계 질서’ 등 저서들을 출간했다.

그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견제와 대결을 반대하며, 대화를 통한 협력으로 양국 이익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5월 이코노미스트와 인터뷰에서 세계는 1차대전 전야 같은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인공지능(AI)이 양 대국의 전면전 발발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중 대결에 대해 “어느 쪽도 정치적 양보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균형에 대한 어떤 식의 교란도 재앙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전형적으로 1차 세계대전 직전과 비슷한 상황에 있다”고 우려했다. 일본이 5년 안에 핵개발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도 예견했다.

그는 또 미-중 대결 구도에서 러시아를 미국 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의 타협을 주장했다. 그는 지난해 펴낸 ‘리더십: 현대사를 만든 6인의 세계 전략 연구’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한다면, 러시아와 유럽 사이 안보 경계선은 모스크바로부터 고작 480㎞ 떨어진 곳에 자리하게 된다. 프랑스와 독일이 잇달아 두 세기 동안 러시아를 점령하려 했을 때 이 나라를 지켜준 역사적 완충지대가 사실상 사라지는 것”이라며 러시아의 우려를 불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의길 기자 홍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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