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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부의 딸…말로 표현 힘든 순간을 그림으로 표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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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숙 작가가 24일(현지시각)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함부르크/노지원 특파원 길게 늘어진 흰 천 안으로 기다란 횃대와 한 여인의 윤곽이 드러난다. 쪽 찐 머리에 흰옷, 고무신...

송현숙 작가가 24일(현지시각)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함부르크/노지원 특파원

길게 늘어진 흰 천 안으로 기다란 횃대와 한 여인의 윤곽이 드러난다. 쪽 찐 머리에 흰옷, 고무신 차림을 한 여인은 홀로 분주하다. 밤일까, 새벽일까.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어둠 속에서 무얼 하는 것일까.

지난 11~15일(현지시각) 영국 런던 리젠트 파크에서 열린 세계 3대 미술품 장터 ‘프리즈(FRIEZE) 마스터스’ 전시관 한가운데 스프뤼트 마거스(Sprüth Magers) 갤러리 부스에 독일 함부르크에서 활동하는 화가 송현숙(71)씨의 작품 ‘붓질의 다이어그램’이 걸렸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현대미술 수석 큐레이터 출신 시나 와그스태프가 저명 작가 5명을 뽑아 이들의 스튜디오(작업실)를 주제로 특별전을 기획했다. 전시를 보러 세계 각지에서 온 미술 애호가들은 한국적 정서가 짙게 묻어 나는 송씨의 그림에 주목했다. 지난 24일 함부르크 자택에서 그를 만나 그동안의 삶이 작품에 끼친 영향에 대해 물었다.

지난 11∼15일 영국 런던 리젠트 파크에서 열린 세계 3대 미술품 장터(아트페어) 프리즈(FRIEZE) 마스터스 특별전 ‘스튜디오’에 전시된 송현숙의 ‘붓질의 다이어그램’(2023년, 캠퍼스 위에 템페라, 130x188cm) ©송현숙·Sprüth Magers Gallery

2023년 10월11∼15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 마스터스의 책자 표지로 송현숙 작가의 작품이 선정됐다. 런던/노지원 특파원

송씨의 작품엔 한국 전통 가옥의 귀퉁이, 빨랫줄을 받치는 장대, 횃대에 늘어진 하얀 천, 고무신, 대나무, 항아리 등 친숙한 토속적 소재가 반복해 등장한다. 달걀·안료·아교를 섞는 ‘템페라 기법’을 쓴다는 점, 작품이 단 몇 차례의 ‘획’으로 구성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에 들어간 획수가 제목이 되곤 한다. 한 획 안에 작가가 원하는 모양·굵기·색깔을 구현해내야 하는 만큼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화법”(2014, 로렌스 린더)이다. 그의 작품은 구상적 요소와 더불어 붓질 행위 그 자체와 구도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의 특징인 추상성을 담고 있다.

세계 3대 미술품 장터에 작품 전시
단 몇차례 획으로 한국 토속 묘사
“고도의 집중력 요하는 화법” 평가

현모양처 되긴 싫어 독일행 결심
재독한국여성모임서 고국과 연대
광주학살·세월호참사 작품 그리고
이태원·오염수방류 땐 집회·행진도

1952년 전남 담양 무월리에서 태어난 송씨는 1972년 파독 간호사로 독일행을 결심했다. 새로운 삶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인간·여성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싶던 마음 때문이었다. 배움에 대한 아쉬움이 많던 아버지는 “남녀차별 없이 힘닿는 데까지 지원해주겠다”라고 했다. 그의 부친은 제사를 중시했지만, “여성으로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라며 광주에 있는 장로교 계열 미션스쿨인 수피아여중·고로 유학 보냈다.

도시에서 공부했지만 졸업 뒤 삶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8남매 중 넷째로 오빠·동생들 밥을 해 먹이던 현숙은 남편과 시어머니를 받들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현모양처가 되긴 싫었다”며 “(간호사) 일이 얼마나 힘들지는 상상도 못 했지만 일단 젊으니까 경험해보자는 마음으로 독일로 갔다”고 했다.

낯선 땅에서 간호사로 살아가긴 쉽지 않았다. 말이 안 통하고 일은 고됐다. 한국이 그리울 때면 고향 마을 풍경을 담은 그림일기를 쓰며 마음을 달랬다. 간호사 경력 4년차이던 1975년 브레멘 정신요양원에서 환자를 대상으로 한 그림 치료를 경험한 뒤 ‘내가 더 잘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연필 드로잉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지만 그림 그리기를 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못 했다.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고단한 삶이 새로운 길에 눈을 틔운 셈이다.

함부르크 미술대학은 1976년 송씨의 습작을 보고 입학을 승인했다. 20대 후반 늦깎이 대학생은 가장 먼저 학교에 나와 가장 늦게 화실을 떠났다. 1981년 함부르크 조형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함부르크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송현숙, “독일 병동 화장실에서 편지 읽은 한국 간호사”, 1979, 종이 위에 유화, 100x70cm. 1982년 함부르크 미술관은 송 작가가 대학시절 그린 드로잉에 주목해 첫 개인전을 열어줬다. 젊은 작가에게 주는 데뷔 기회였다. 전시에는 그가 병원에서 일하던 시절 화장실에 숨어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던 자화상도 포함됐다. ©송현숙

그의 작품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어린 시절 고향의 기억 등 내면세계를 그린 것이다. 송씨는 한국을 떠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자신을 “산골 마을에서 자라난 한국 농부의 딸”이라고 소개한다. 그의 작품에 영감을 주는 소재 중 하나는 그가 공들여 가꾸는 채소밭이다. 그는 농부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결국에는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림 작업도 농사 짓듯 한다고 했다. 농사는 “최선을 다하되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깨달음을 줬다.

다른 하나는 공동체와 연대다. ‘동일방직사건’(1978년 2월21일 어용 노총과 회사에서 동원한 깡패가 민주노조를 파괴하려 여성 노동자에게 똥물을 뿌린 사건)을 다룬 1979년의 작품, 1980년 5월18일 광주 학살을 다룬 1982년 작품이 한 예다. “슬픈 일, 기쁜 일을 함께 나누던” 고향 무월리의 공동체는 그에게 연대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그가 고국과 연대하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재독한국여성모임 활동이다. 이 모임은 1976년 재독 간호사가 병원에서 해고당한 뒤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는 사건에 맞서, 한국 여성들이 서명운동을 벌이며 투쟁한 것을 계기로 1978년 9월 결성됐다. 한국에서 권위주의 독재에 직접 맞서지 못한 아쉬움을 독일 현지 예술계와 함께 한국 민주화 운동에 연대 활동을 하며 풀었다.

송현숙의 2014년 작품 ‘붓질의 다이어그램, 4월16일 세월호 비극을 생각하며 그림’(캔버스 위에 템페라, 170x240cm). ©송현숙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땐 이를 주제로 한 작품을 그해 연말 서울의 학고재에서 소개했다. 지금은 지난해 10·29 이태원 참사 뒤 만들어진 함부르크 해외촛불연대 모임의 일원으로 매달 집회를 한다. 7월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규탄을 주제로 일본 총영사관 앞과 시내에서 2시간씩 행진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더라도 “후세에게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1979년 결혼한 사진작가 요헨 힐트만은 변함없이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고 있다.

“그림이요?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죠.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든 순간이 많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더 이상 “특별히 바라는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다”지만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을 꾸준히 하고, 매일 최선을 다해 배우고 발전하면서, 나답게, 분수에 넘치지 않게,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런던·함부르크/노지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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