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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가 판치는 독일의 위기? ‘시민저항권’이 국가 지킨다

Summary

독일 국민은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급부상이 사회 안정을 위협한다고 걱정하면서도, 기본법(헌법)의 ‘방어적 민주주의’ 규정에 따라 권력 장악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독일 국민은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급부상이 사회 안정을 위협한다고 걱정하면서도, 기본법(헌법)의 ‘방어적 민주주의’ 규정에 따라 권력 장악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본법은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에 저항할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사진은 3천여명의 시민들이 2018년 독일 고슬라어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의 모임에 반대하기 위해 “고슬라어는 다양성을 존중한다. 인종차별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라고 쓰인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이다. 고슬라어/EPA 연합뉴스

독일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20여킬로미터 떨어진 포츠담시. 독일 16개 주 가운데 하나인 브란덴부르크의 주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미국·영국·소련이 전후 처리 방안을 논의한 포츠담회담이 열린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최근 브란덴부르크주 여론조사에서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독일대안당)의 지지율이 기존 정당인 사민당(SPD)과 기민련(CDU)보다 높게 나오면서 전 독일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독일대안당 후보가 지난 6·7월 잇따라 지방 소도시 지자체장에 당선됐지만, 주 단위 선거에서 승리한 적은 아직 없다.

극우정당은 옛 동독 지역 주민들의 기존 정치에 대한 불만을 파고들며 빠르게 세력을 확장 중이다. 지난 9월7일 포츠담시에서 만난 마르틴 고르홀트 전 주정부 과학연구문화부 차관은 “옛 동독 지역이 독일 내 갈등의 화약고가 되고 있다”며 “극우세력이 사회적 아노미(혼란) 상태를 악용한다”고 말했다.

 

■ 연정을 통한 협치

독일 현지에서 만난 학자·정치인·언론인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극우세력이 독일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걱정하면서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인다. 그 바탕에는 독일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대한 강한 신뢰가 깔려 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에 성공한 모범국으로 꼽힌다. 이런 성공의 비결로는 의원내각제에 기반한 대화와 타협의 정치, 시장과 정부 역할의 조화를 추구한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두 축이 꼽힌다.

전후 74년간 독일 총리를 역임한 사람은 모두 9명이다. 올라프 숄츠 현 총리를 제외한 나머지 8명의 평균 재임기간은 9년에 이른다. 같은 기간 일본의 총리가 모두 50명으로, 평균 재임기간이 1년6개월에 못 미치는 것과 대비된다. 독일의 정치 안정은 여러 정치세력이 연정을 통해 협치를 이뤘기 때문이다. 영국 언론인 존 캠프너는 저서 ‘독일은 왜 잘하는가’에서 이를 “자유 민주주의가 거둔 위대한 승리”라고 격찬했다.

주요 정당 중 어느 한곳도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기 힘든 정치구조에서 연정은 필연적이다. 중도우파 기민련과 중도좌파인 사민당의 대연정도 네차례나 있었다. 다양한 정치세력 간의 연정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대화, 타협의 정치문화를 탄생시켰다. 연정을 하려면 두꺼운 연정합의서를 먼저 작성해야 한다. 연정 파트너와의 약속 이행은 자연스럽게 신뢰 정치의 토양이 됐다. 한국정치를 전공한 하네스 모슬러 독일 뒤스부르크 에센대 교수는 “연정합의서 작성은 국민이 지루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런 과정이 있기 때문에 합의 내용이 지켜진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안정의 초석 사회적 시장경제

 독일은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다. ‘라인강의 기적’은 전후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크게 기여했지만,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독일 특유의 모델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독일 모델은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살리면서, 시장이 부족한 것은 정부가 보완해서 사회 공동체적 가치를 살리는 시스템이다. 노동·노사문제 전문가인 게르하르트 보슈 한스뵈클러재단 교수는 “자유로운 시장과 국가를 연결해서 국민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한 것은 독일의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큰 자부심을 보였다. 산업별로 성별·연령·직급에 상관없이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제’, 노동자들을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시켜 노사협력을 이끌어낸 ‘공동결정제’도 사회적 시장경제의 성과물이다.

독일의 올해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예상되면서 ‘유럽의 병자론’이 제기되는 것에 대해서도 성급한 시각이라는 의견이 많다. 보슈 교수는 “독일 경제가 인프라와 디지털 투자 미흡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지만, 한해 성장률만 가지고 ‘병자’ 취급해서는 안 된다”며 “한국은 소수 대기업이 수출을 주도하지만 독일은 수많은 강소기업이 수출의 95%를 차지할 정도로 경제가 튼튼하고, 무엇보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보험과 연금제도 등 복지 시스템이 독일 안정의 초석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 정치안정이 경제발전을 부른다

 독일은 연정과 협치를 통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장과 조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독일 통일도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이라는 버팀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의견이 많다. 박종구 초당대 총장은 “독일은 정치가 잘돼야 경제도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강조한다. 연정이 일상화된 독일은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정부 정책이 갑자기 바뀔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작다. 정치학자인 카를루돌프 코르테 뒤스부르크 에센대 교수는 “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권력이 공정하게 교체되는 안정적인 정치 시스템은 기업가와 투자자에게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에너지 분야는 독일 정책의 일관성을 잘 보여준다. 독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위기 속에서도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한다. 독일의 민간 에너지정책 싱크탱크인 아고라 에네르기벤데의 지몬 뮐러는 “에너지 가격 상승이 국민에 큰 부담을 주지만, 탈원전 정책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탈원전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이뤄진 사회적 합의이고, 역대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원전·석탄발전소 감축 정책을 일관되게 시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연구소의 염광희 박사는 “독일이 탈원전 때문에 에너지 위기가 심화되고 국민 불만이 높다는 일부 한국 언론의 보도는 가짜뉴스에 가깝다”고 말했다.

■ 존경받는 독일 정치인

독일 제2공영방송(ZDF)은 2003년 ‘가장 위대한 독일인’ 100인을 조사했는데, 역대 총리가 무려 6명이나 포함됐다. 독일 건국의 아버지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가 1위를 차지했고, 신동방정책으로 통일의 기반을 놓은 빌리 브란트(5위)와 통일을 실제 성사시킨 헬무트 콜(13위)도 상위 순위에 올랐다. 다시 조사를 하면 16년간 집권한 최장수 총리이자, 조용한 리더십으로 존경받은 앙겔라 메르켈도 선정되지 않을까?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한국으로서는 부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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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정치 지도자들이 존경받는 것은 국민의 뜻에 따라 좌우 진영논리를 넘어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를 과감히 선택하는 뛰어난 리더십을 보였기 때문이다. 독일 전문가인 김종인 박사는 “기민련이 주도한 사회적 시장경제에 사민당이 협력하고, 사민당의 신동방정책을 기민련이 계승해 통일을 완성했다”고 강조한다.

독일 정치인들은 과거 나치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철저한 민주주의 확립과 교육에도 앞장섰다. 브란트 총리는 1970년 폴란드 수도인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독일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사죄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역사적 책임에는 끝이 없다”는 독일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기억된다. 모슬러 교수는 “독일의 과거에 대한 철저한 사과와 역사적 정리는 정치·사회의 안정적 발전과, 내부 갈등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토대가 됐다”며 “최근 한국에서 불거진 역사 후퇴 논란은 과거사에 대한 정리와 사회적 합의가 아직 미흡함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 방어적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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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극우세력의 부상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위기로 인한 경제난과 생활고 등 경제적 요인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마르틴 고르홀트 전 차관은 “2015년 시리아 난민 유입, 2020년 코로나 위기,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 위기를 거치며 경제적 어려움이 커진 게 극우세력 확산의 기폭제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난민 반대도 결국 경제적 불만이 작용한다. 우리도 살기 어려운데 왜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냐는 것이다.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난민을 합치면 400만명으로, 독일 국민의 5%에 이른다. 옛 동독 지역이 극우세력의 본거지가 된 배경에도 동·서독 통일 이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지역 간 경제적 격차가 놓여 있다.

독일대안당은 외국인 혐오와 반이슬람 정서를 표출한다. 난민 수용과 과거 역사 반성에 반대하고, 유로 탈퇴를 주장하는 등 독일이 그동안 지켜온 가치와 성과를 부정한다. 이런 행보는 합헌과 위헌의 경계선에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토마스 할덴방 독일 헌법보호청장은 지난 8월 독일대안당의 극우적 행태에 대해 공개 경고했다. 독일 정보기관인 헌법보호청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협하는 극단주의 세력을 감시하고 독일공화국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독일의 기존 정당들은 좌우 구분 없이 헌법 질서를 위협하는 극우정당은 연정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배경에는 독일 헌법인 기본법의 ‘방어적 민주주의’ 규정이 있다. 기본법 제20조 제4항에 따라 모든 독일인은 (헌법) 질서의 폐지를 기도하는 자에 대하여 다른 구제수단이 불가능할 때는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위헌 정당과 결사를 금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많은 독일 국민이 극우세력의 권력 장악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의 정론지 중 하나인 ‘디 차이트’가 2017년부터 시작한 ‘독일이 말한다’ 프로젝트는 독일 사회의 희망과 저력을 보여준다. 디 차이트는 연방 선거를 앞두고 극우정당이 급부상하고 사회 분열이 극심해지자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들끼리 일대일 대화를 나누는 행사를 기획했다. ‘독일이 말한다’는 2018년 ‘유럽이 말한다’, 2023년 ‘세계가 말한다’로 확장됐다. 지금까지 누적 기준 120여개국 29만명이 참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디 차이트의 온라인 부편집장인 제바스티안 호른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만남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신뢰를 형성할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 한국의 해법을 찾아

한국 사회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대립과 갈등이 한층 심해지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사회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비판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과 갈라치기를 통해 갈등을 증폭시킨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대로 가면 과연 공동체 유지가 가능하겠느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2021년 한국을 선진국으로 공식 인정했다. 하지만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은 함께 가야 지속가능하다는 것을 독일 사례는 보여준다. 한겨레신문사가 오는 10월11일 제14회 아시아미래포럼의 주제를 ‘다중위기의 시대: 공존의 길을 찾아’로 잡고, 독일 모델을 살펴본 이유이다.

대런 애스모글루(다론 아제모을루) 미국 엠아이티(MIT) 교수는 저서인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는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제도”라고 강조했다. 나라마다 역사적, 사회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독일 방식을 따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우리에게 맞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모슬러 교수는 “독일의 정치적 안정이 의원내각제를 통한 협치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며 “한국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가 드러난 만큼 권력구조와 선거제도를 모두 개혁해야 하는데, 제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과 방식”이라고 말했다.

베를린·쾰른/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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