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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만원, -24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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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거리 서울 시민 주최 연합군환영대회(1945년 10월20일) 당시 아치볼드 아놀드 군정장관(가운데)과 존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아놀드의 왼쪽), 그리고 하지의 ‘문고리 권력’이었던...

책거리

서울 시민 주최 연합군환영대회(1945년 10월20일) 당시 아치볼드 아놀드 군정장관(가운데)과 존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아놀드의 왼쪽), 그리고 하지의 ‘문고리 권력’이었던 통역관 이묘묵(아놀드 오른쪽)의 모습. ⓒNARA 돌베개 제공

역사학자 정병준은 ‘1945년 해방 직후사’(돌베개)에서 해방 직후 미군정이 집행했던 정치자금의 규모를 따져봅니다.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된 1946년 5월, 미군정은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한다고 했지만 각 정치인들에게 건넨 미군정의 정치자금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는 겁니다.

당시 친일파 중심의 ‘대한경제보국회’라는 단체는 대출을 받아 이승만에게 1000만원의 정치자금을 건넸는데, 이는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의 특별명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는 ‘좌우합작운동에 쓰라’며 김규식에게도 정치자금을 건넸는데, 그 금액은 이승만에게 건넨 돈의 3분의 1도 못 되는 300만원에 그쳤습니다. 좌우합작운동의 다른 일방이었던 여운형에게는 한푼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기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원들에게 위조지폐 240만원어치를 찍어냈다는 누명을 씌워 탄압한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을 일으킵니다. 정리하자면, “미군정은 이승만에게 +1000만원, 김규식에게는 +300만원, 김구와 여운형에게는 0원, 박헌영에게는 -240만원을 제공”한 셈이란 겁니다.

미군정이 정치세력마다 다르게 줬던 정치자금 규모의 차이, 그러니까 정치권력을 불하(拂下)했던 원칙은 오늘날 한국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서 과연 어떤 합리성을 찾을 수 있는지, 더 나아가 광범위한 인민 대중의 뜻과 일치하는지 여부이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아무도 아닌 자”들에게 규정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최원형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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