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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식에 시달리는 속물들의 욕망

Summary

내가 뭐 어때서 황선만 지음 l 삶창(2023) 지독하기로 치면 문학이란 열병만 한 것이 없다. 돈도 되지 않고 어느 경지에 이르는 과정은 외롭고 긴 지라 고달프기 짝이 없다며 말...

내가 뭐 어때서

황선만 지음 l 삶창(2023)

지독하기로 치면 문학이란 열병만 한 것이 없다. 돈도 되지 않고 어느 경지에 이르는 과정은 외롭고 긴 지라 고달프기 짝이 없다며 말려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외려 그런 잔소리 늘어놓는 사람을 속물 취급하며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소명의식을 더 단단히 다진다. 그러나 일상이라는 산성은 얼마나 세던가. 세월이 흐르며 그 열병의 순도를 현격히 낮춘다. 재능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열정을 수그러지게 하기도 한다. 젊은 날의 문우가 어느새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는데, 나만 아직 제자리에서 맴돈다는 열패감에 못 이겨 뜻을 꺾는다.

그런데 드문 예외현상을 지켜보았다. 젊은 날 문학에 ‘들린’ 사람도 어느덧 고급독자임을 자처하는 마당에 황선만은 여전히 글을 썼다. 그에게는 고향의 선배 문인이 자랑거리였다. 이문구를 흠모하고 김성동을 연모했다. 또래인 김종광은 그가 늘 부러워한 작가다. 그렇다고 먹고사는 일에 무심하고 가정에 무책임한 채 글만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찌감치 고향에 내려가 지역신문 기자도 하고 사업도 해서 자리 잡았고 시민운동도 했고 독서운동도 활발히 펼쳤다. 요즘엔 마을재생 사업에 헌신했다.

이런 와중에도 소설을 꾸준히 쓴다고 하길래, 그 나이에 왜 아직도 문학을 포기하지 않나 의아했다. 미루어 짐작건대 젊은 날의 지독한 궁핍은 언어로 쌓은 자신만의 성채에 목숨을 걸게 했을 법하다. 짓눌린 현실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의 세계가 그곳에 펼쳐지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쓰던 사람도 끝내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며 접을 나이이지 않은가. 소설가연하며 고고한 척하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소망을 마침내 달성했다는 자기만족 때문일까.

본디 아는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위험하다. 평소 듣거나 보았던 내용이 소설에 버무려져 있기 마련이며, 작품의 주제의식과 소설 쓴 이의 가치관이 어긋나는 대목을 누구보다 잘 짚어내는 탓이다. 그러니 칭찬보다 염려의 말이 먼저 터져 나오고, 격려보다는 흠잡은 말을 뱉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열 편의 소설이 실린 ‘내가 뭐 어때서’를 읽으면서 안도했다. 이 소설집에 피운 열망과 열정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더 키워나간다면 존재감 있는 이야기꾼으로 성장하리라는 믿음이 들어서다.

도농복합도시는 기묘한 공간이다. 농촌으로 상징되는 공동체는 도시라는 괴물에게 압살당한 지 오래다. 도시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멀어진 만큼 콤플렉스 덩어리다. 이런 공간에서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파헤친다는 것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 변방의식에 시달리는 이들의 욕망은 그만큼 강렬하고 그에 비례하여 뒤틀려 있기 마련이다. 작품을 읽으며 그가 왜 계속 소설을 놓지 않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속물이 되지 않으려고 소설을 써왔구나 싶었다.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 세상을 물들일 수 있는 법이다. 그는 이름하여 ‘위기(爲己)의 글쓰기’를 해온 셈이다.

문학의 고고성을 울린 만큼 냉정한 판단도 뒤따를 터다. 경험을 어떻게 발효해야 소설이 되는가, 김종광으로 이어진 이문구 문체의 물길을 어떻게 본인의 글밭에 댈 것인가, 반전이 풍자와 해학이 되려면 어떤 기법이 필요한가. 이루어낸 것보다 이루어야 할 일이 더 많다. 아마도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을까 싶다. 입때껏 해왔듯 치열하게 쓸 수밖에 없을 터다. 그리하여 교양과 체면의 가면을 쓴 허위의식을 능청스럽게 까발리는 우리 시대의 이문구가 되길 기대해본다.

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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