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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함정 벗어나 ‘불평등’ 직시하라

Summary

남성 중심적인 일터에 여성이 진입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사회다. 일터에 진입한다 해도 이들 앞에는 수많은 ‘젠더 장벽’이 존재한다. 일터에서 어떤 구조적 성차별이 존재하는지 인식하고...

남성 중심적인 일터에 여성이 진입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사회다. 일터에 진입한다 해도 이들 앞에는 수많은 ‘젠더 장벽’이 존재한다. 일터에서 어떤 구조적 성차별이 존재하는지 인식하고 이를 공동으로 해결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흠결없는 파편들의 사회’ 저자 김현미 교수는 말한다. 게티이미지 뱅크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

한국 2060 여성들의 일 경험과 모험

김현미 지음 l 봄알람 l 1만8000원

과거보다 직장에서 ‘생존하는’ 여성들이 늘고 지난 2015년 시작된 ‘페미니즘 리부트’의 물결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많아지자, 우리 사회에는 성차별이 해소됐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20~30대 남성들은 ‘역차별’을 운운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기까지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젠더 각본’에 따라 구조적 성차별을 겪고 있는 실태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 원인을 찾고 해법을 모색하는 책이 나왔다. 페미니스트로서 오랫동안 한국 여성들의 일 경험을 해석하며 페미니즘이 현대의 일터에서 어떤 자원이 될 수 있을지 질문해온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 교수의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다.

책의 부제는 ‘2060 여성들의 일 경험과 모험’이지만, 저자는 20~30대 여성들이 일터에서 겪은 생생한 경험들을 보여주고 그 경험들을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그만큼 그들이 놓인 현실이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20~30대 여성들은 취업을 위해 학벌, 학점 등에 사회봉사, 성형수술까지 ‘취업 9종 세트’를 갖춰야 치열한 취업 시장에서 경쟁적 우위를 확보한다. 이 경쟁력을 갖춰나가는 과정에서 가정 내 모부는 딸들의 외모, 감정, 태도를 끊임없이 검증하고 평가한다. 여성에게 능력의 범주는 학력, 자격증, 일 경험뿐만 아니라 마른 몸, 애교 있는 말씨와 꾸미는 솜씨 등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외모 지적 등 성차별하는 부모의 태도에 불만이 있다가도, 어느새 젊은 여성들은 부모의 가치관에 동화되거나 타협하면서 보수화된다. 자신에게 물적 자원을 투자해준 부모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성공한 딸’ ‘능력있는 딸’ ‘애교 있는 딸’로 자리매김하고 싶어한다.

스펙을 쌓고 각종 경험을 쌓아도 여성이 정규직이 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와 같다. 전통적 의미의 직장이나 직업 개념이 사라지고 노동 유연화가 진행되면서 여성의 고용주기는 더 짧아졌다. 많은 여성은 지속적·임시적 단기 취업과 장기화된 학습 및 훈련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특히 청년들이 취업-실업-교육-훈련 상태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현상을 ‘요요 현상’이라고 부르면서, 요요 현상은 20대뿐만 아니라 30~40대 여성들에게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렇게 여성의 일 경험은 파편화되고, 그렇게 여성은 표류한다.

책은 여전히 공고한 ‘남성연대’ 문화 외에도 노동유연화와 함께 일터를 장악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가 여성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좌지우지하는지 설명한다. 이 체제에서는 누구라도 학력, 외모, 사회적 영향력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능력을 향상시키면 자신의 경제적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신념이 강화된다. 노력과 경쟁을 통해 완벽한 여성이 될 수 있다는 ‘능력주의 신화’에 포획된 여성들은 구조적 차별을 말하는 대신 자신을 더 갈아 넣는 방식으로 사회생활을 한다. “아무도 반박 못 할 만큼 잘 해내고 싶다”는 여성들과 “성차별인 건 알지만 ‘차별받았다’고 말하는 건 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지나치게 노력”하다가 완전히 소진돼 “불만도 남기지 않고 일터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어렵게 정규직이 된다 해도 이들 인생 앞에는 또 다른 ‘젠더 장벽’들이 등장한다. 젊은 여성들은 조직에서 ‘친밀성의 공연자’ 역할을 떠안는다. 과거엔 남성과 직무가 다른 보조 역할의 젊은 여성을 채용해 ‘사무실의 꽃’이라고 불렀다면, 이제는 고학력 고스펙의 여성을 채용해 팀원 간 소통의 부재를 메우고 일터의 긴장을 완화하는 역할을 추가로 부여한다. “똑똑하고 야무진 여성”인 여성에게 “남자는 애교와 순발력이 없어 이런 일을 잘 못 할 것”이라며 점심 메뉴를 취합하고 식당 예약하는 일을 시킨다거나 20대 여성에게 “요즘 유행하는 걸그룹 춤 춰봐라”라고 주문하는 식이다.

남성 중심적인 조직에서 남성 동료들은 여성 동료에게 적대적 성차별(여성에 대한 반감, 무시, 부정적 평가)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온정적 성차별(여성을 보호, 지지, 숭배가 필요한 대상으로 규정하고 호의 베풀며 종속성 강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최근엔 여성의 능력은 높이 사되 걸맞은 지위나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 ‘능력주의 성차별주의’가 새롭게 등장해 젋은 여성들의 열정이 기업에 이용당한 뒤 “왜 잘렸는지 모르게” 잘리는 상황도 많이 연출되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20~30대 여성들이 놓인 곤경을 상세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40~60대 여성들이 겪는 ‘젠더 장벽’들도 함께 다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리천장 말고도 성별 직종 분리, 유리 낭떠러지, 유리 에스컬레이터와 같은 구조적 차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저자가 수많은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 들여다본 한국 여성들의 노동 환경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숨막히고 질식 직전 상태다. 그런데도 많은 여성은 ‘능력주의’라는 함정에 빠져 이 구조적인 불평등을 언어화하고 공동의 해법을 모색하기보다 흔들림 없이 성취에 집중하려는 경향성을 띤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김 교수는 이런 것을 ‘동화’로 정의하며 “동화에 저항할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와 일상에서 젠더, 계급, 인종, 세대 등에 의한 불평등을 문젯거리로 보고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말, 행동, 전략, 실천을 페미니즘이라고 본다면,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금 내가 있는 일터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것일 것이다. 성차별에 분노하고 젠더 장벽을 부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 더 때를 기다리고 일단은 ‘능력’을 고양시키겠다는 여성들이나 아예 구조적 성차별에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는 여성들에게 동시대 여성들이 놓인 사회구조를 넓게 조망하게 한 뒤, 용기를 내 한발이라도 내딛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양선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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