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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치 않은 서울시의 백남준기념관 운영종료 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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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큰대문 옛집 앞을 그의 할아버지 상여가 지나가고 있는 옛 사진. 백남준의 드로잉에 붙었던 것이다. 지난달 26일 오후 5시20분, 신문 1판 마감을 끝내고 저녁을 맞는 시...

백남준의 큰대문 옛집 앞을 그의 할아버지 상여가 지나가고 있는 옛 사진. 백남준의 드로잉에 붙었던 것이다.

지난달 26일 오후 5시20분, 신문 1판 마감을 끝내고 저녁을 맞는 시간에 서울시립미술관이 낸 낯선 보도자료 이메일 하나가 전송됐다. ‘서울시립미술관, 현대미술 선각자 ‘백남준 기념관’ 활성화 나선다’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지난 2017년 3월 서울 창신동에 백남준 기념관이 문을 연 이래로 개관전을 시작으로 다수 기획전과 탄생 90주년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작품 전시·연구·교육에 기념관이 활용돼 왔으나 공간이 협소하고 항온·항습 등 전시에 불리한 환경 개선 등이 필요해 활성화에 나서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백남준 기념관을 작가정신이 담긴 창의적인 공간이자 세계적인 예술가, 한국 미술사에도 큰 영향을 준 백남준을 기억하는 곳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한겨레는 지난달 5일 서울시립미술관이 산하 백남준기념관의 운영 효율성 떨어지고 관객들도 극히 적어 11월부터 운영을 접겠다고 밝힌 사실을 단독보도한 바 있다. 그뒤 문화계 중견급 인사들이 잇따라 언론기고를 통해 반발하는 등 비판이 커졌고, 26일 보도자료는 기실 이런 여론을 수용해 운영 종료 방침을 번복하는 의미로 나온 것이었다. 한겨레 보도 직후 서울시 쪽은 해명자료를 내어 백남준 기념관이 창신동 재개발 지역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미술관 운영종료 방침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시립미술관 쪽은 종료 방침을 철회하거나 번복한다는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기존 공간과 시설의 열악한 상황을 활성화한다는 언급만 늘어놓아 선심 시책을 내놓은 듯 포장한 자료를 낸 것이다.

중요한 공간성과 역사성을 지닌 터에 들어선 기념관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점찍고 문닫는 상황으로 내몰다가 논란이 불거지고 비판 여론이 일자 한발 물러난 것이 본질인데, 이런 사정을 호도하는 내용을 담은 것은 자신들의 책임을 감추려는 의도로 비친다.

1937~50년 백남준이 생활한 창신동 집터는 서울에 남은 백남준의 거의 유일한 연대기적 공간이다. 이곳은 백남준이 1960~70년대 전위적 영상·음향 작업을 지속할 수 있게 한 원형질을 형성한 무대였다. 친일파 부호이자 기업가였던 백낙승(1886~1956)이 창신동에 조성한 3000평 짜리 대가옥에서 성장한 백남준은 이 집에서 수송소학교와 경기중학을 통학했고 뚝섬과 세검정 등으로 소풍도 다니면서 동대문을 중심으로 한 서울 도심거리의 온갖 이미지와 소리들을 뇌리에 새겨넣었다. 훗날 그가 철학자 도올 김용옥과의 대담에서 “인생을 결정지은 사상이나 예술의 바탕은 한국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 모두 흡수한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는데 이런 바탕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시공간의 무대가 바로 창신동이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회복한 뒤 어린 시절 친구였던 이경희 여사에게 선물한 여러 점의 드로잉에 창신동 시절 같이 돌아다녔던 곳의 지명과 그때 들은 음악과 풍경들에 대한 파노라마적 묘사가 들어간 점에서도 극명하게 확인된다.

기념관 내부 안쪽의 뉴욕 스튜디오와 책상을 재현한 공간.

운영에서 손뗀다는 방침을 번복한 건 다행스럽다. 하지만, 번복의 책임을 가린 보도자료의 빈약한 내용에서 보이듯 향후 기념관의 운명이 얼마나 달라질지는 미지수다. 백남준 연구에 평생을 진력해온 김홍희 전 관장이 힘을 쏟아 개관한 이 기념관은 개관 뒤 6년 동안 운영 콘텐츠 업데이트를 한번도 하지않을 만큼 이후 관장들은 무관심했고 시설을 하대해왔기 때문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창신동 일대를 도시재생 1호사업지로 했던 박원순 전 시장의 정책을 뒤엎고 기념관이 위치한 창신동 197번지 일대 인근에서 대규모 단지 재개발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 시 쪽은 기념관이 재개발지구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무관하다는 점을 강변하지만, 재개발이 본격화되어 고층 주거단지가 들어서면 기념관 주변은 마치 알박기한 낡은 집처럼 고립될 것임이 분명하다.

최은주 시립미술관장은 이런 주변 재개발의 바람 앞에서 어떻게 기념관의 정체성을 지키고 공간 확장과 운영컨텐츠를 혁신할 것인지 대안부터 가져와야 한다. 여전히 한국 미술계에 싸늘한 유족 대리인 켄 백 하쿠타와의 관계 개선과 협력, 국내 유일의 백남준 관련 연구 전시기관인 경기도 백남준아트센터와의 관계 정립 등 과업들은 찾기만 하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여론 눈치를 보며 운영 효율성만 따지는 얕은 수를 둘 것이 아니다. 백남준이 서울에 남긴 소중한 흔적인 옛 집터의 장소성을 전세계에 어떻게 알리고 백남준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이들의 난장 마당으로 확대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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