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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한반도 미술사의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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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미술가 김창덕의 작품 ‘가난한 생활’. 연립서가 제공 재일조선인미술사 1945-1962 미술가들과 표현 활동의 기록 백름 지음, 노유니아·정성희 옮김 l 연립서가 l 3만...

재일조선인미술가 김창덕의 작품 ‘가난한 생활’. 연립서가 제공
재일조선인미술사 1945-1962

미술가들과 표현 활동의 기록

백름 지음, 노유니아·정성희 옮김 l 연립서가 l 3만5000원

재일조선인의 미술작품과 자료를 수집·관리하는 재일코리안미술작품보존협회 대표인 재일조선인 3세 백름의 ‘재일조선인미술사 1945-1962’는 한국 사회에서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언급되지 않았던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작품 활동과 생활을 추적한 책이다. “분열을 촉구하는 연구가 아니라 지금껏 제대로 언급된 적 없는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이야기가, 역사에서 이미 회자되고 있는 다른 미술가들과 함께 논의되고 제대로 평가받기를 바랍니다.” 이념의 대립, 무지에서 오는 편견 등으로 인해 줄곧 타자화되었던 재일조선인들의 작품과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발굴되지 않았던 “동아시아 미술의 어느 한 부분”을 되살리고, 하여 “보다 건설적인 논의”를 해나가자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은 개별적이면서도 집합적 존재들이었다. 해방 이후 일본에 살면서, 그것도 재일조선인으로서 작품 활동을 하는 일은 일종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었다. 한편으로는 1950년대 미군기지 반대투쟁 같은 일본의 사회적 문제 등을 “공통의 주제로 채택하고 리얼리즘적 수법을 통해 꾸준히 제작활동을” 함께 이어나갔다. 하지만 일본인 미술가들과의 교류가 없었다는 이유로, 혹은 연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결정적으로는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거나 연구를 회피”함으로써 “전후 일본 문화사의 중요한 국면” 하나가 소실됐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지은이가 주목한 첫 번째 사건은 “재인조선인 미술가들의 작품을 재일조선인 미술가 자신의 손으로 엮어낸” 최초의 작품집 ‘재일조선인미술가화집’이다. 화집 발행사에는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이 걸어갈 근본적인 방향”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념과 실천”으로 규정하고 있다. 화집 속 작품은 크게 “화가들의 귀국 문제, 동포의 생활, 남조선의 구국투쟁(4·19혁명)”을 테마로 삼은, 대개 “인물화나 사실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이었다. 이와 같은 경향 속에서, 1940년대 후반부터 1953년 사이 가장 주목할 만한 재인조선인 미술가로 지은이는 김창덕을 꼽는다. 그는 일본의 미술단체 행동미술협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탓에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도 일부 비난이 있었지만, 대표작 ‘가난한 사람들’ 등을 통해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던 재일조선인의 생활상을 극명하게 표현”했다. 이미 1935년 일본 미술단체인 이과미술협회 추천으로 ‘이과전’에서 입선할 만큼, 김창덕은 탁월한 작품성을 선보였다. 그는 “기술적으로도 지향해야 할 선배”이면서 “젊은 미술학도들이 진심으로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존재”였다. “재일조선미술회가 1953년에 획기적으로 결성된 이후, 급속히 활동의 고조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창덕을 존경하고 따르는 후배들이 서로 구축하고 있었던 강한 연대감이 뒷받침되어 있다고 사료된다.”

재일조선미술가화집의 표지. 연립서가 제공
재인조선인 미술가들의 관심사, 즉 “화가들의 귀국 문제, 동포의 생활, 남조선의 구국투쟁(4·19혁명)” 등은 “여러 명의 창작자가 어떤 사건이나 사항을 공통 주제로 설정하여 각자의 해석을 근거로 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을 통해 발현되었다. 지은이는 이를 “테마 제작”이라고 명명한다. 테마 제작은 1957년부터 논의를 시작해, 1958년에는 “재일조선인의 생활”, 1960년대에는 “귀국과 남조선의 구국투쟁”으로 이어졌다. 작가들의 토론은 치열했다. “사회주의 국가에는 자유가 없다”는 과격한 주장이 돌출되는가 하면 “예술이 권력의 종속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뒤를 이었다.

사실주의에 힘이 쏠린 것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이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목표로 삼아야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즉 사실성이야말로 “시대가 요청하는 표현 양식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출신 한동휘는 부산중학교 재학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들이 동족끼리 서로 총을 겨누는 상황에 휘말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부모님의 뜻에 따라 홀로 일본” 행을 선택했다. 한동휘는 고향 제주의 풍경을 소재 삼아 밝고 경쾌한 수채화를 많이 그렸다. 하지만 동포들의 생활에도 주목하면서 “현지로 가서 조사하여 그린” 르포르타주 회화 양식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편 지은이는 4·19혁명을 계기로 ‘남조선 구국투쟁’을 테마로 작품 활동을 한 리철주, 한우영, 박일대의 작품도 상세하게 소개한다. 그중 박일대의 ‘궐기한 남조선의 인민’은 “극단적인 명암법을 사용하여 힘겨운 투쟁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물들의 결의를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평한다. 적절한 원근의 효과는 “시위에 참여한 많은 민중과 시위대의 규모”를 잘 표현했고, 휘날리는 깃발과 옷자락, 앞쪽에 크게 그려진 인물들의 동작이 생동감과 함께 “민중이 느끼는 분노나 슬픔을 보는 이에게 충분히 전달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작품들이 “확실히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성격이 강하고, 내용 역시 매우 정치적”이어서 홀대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이 시대 작가들이 추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포함한 사실적인 표현을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인 미술가라는 같은 처지에 있던 이들의 내부에서 솟아 나온, 변화를 향한 희구이자 주체적인 방법론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조한다.

재일조선인 미술가 한동휘의 작품 ‘가와사키 조선인 부락’. 연립서가 제공
재일조선인 미술가 박일대의 작품 ‘궐기한 남조선 인민’. 연립서가 제공
외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재인조선인 미술가들 역시 당대 일본 작가들과 교류하며 작품 세계를 넓혀갔다. 행동미술협회, 일본청년미술가연합, 일본판화운동협회에 가입한 미술가들이 적잖았고, 각종 공모전에도 수시로 작품을 출품했다. 1961년 열린 제14회 ‘일본앙데팡당전’에는 다수 조선인 미술가들이 작품을 출품했다. 지은이는 조선인 미술가들이 “봉건제도나 인습에서 미술을 해방하여 민주적 미술 문화를 창조한다”는 취지로 작품 활동을 하는 일본 작가들에게 모종의 기대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재일조선인 미술의 역사는 여전히 어둠 속에 남겨져” 있다. 그것을 어둠에서 끄집어내면,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한반도 미술사의 비어 있는 퍼즐 조각을 다소나마 맞출 수 있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재일조선인 미술가들뿐이 아닐 것이다. ‘재일조선인미술사 1945-1962’는 우리 문화, 아니 역사에서 지워진 여러 분야의 빈틈을 적절하게 메울 수 있는 단초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노작(勞作)이라고 할 수 있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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