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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 “집배원·소방관 초대…일하는 분들께 국악 들려주고파”

Summary

‘작은 거인’ 김수철이 다음달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한다. 김수철은 국악기와 양악기 연주자로 결성한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하며 공연을...

‘작은 거인’ 김수철이 다음달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한다. 김수철은 국악기와 양악기 연주자로 결성한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하며 공연을 이끈다. 데뷔 45년 만에 그가 꿈꿔온 무대가 이뤄지는 것이다.

김수철은 ‘못다 핀 꽃 한 송이’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정신 차려’ 같은 히트곡을 내며 1980년대 한국 가요계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1984년엔 ‘케이비에스(KBS) 가요대상’에서 대상까지 차지하며 ‘가왕’ 조용필의 독주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김수철은 대중가요계 정상에 오른 뒤 관심과 열정을 키우며 국악의 대중화·현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동안 여러 대중가수들이 일회성으로 국악과 대중음악을 접목한 노래를 내놓기도 했지만, 김수철은 국악에 뿌리를 둔 음악을 끊임없이 발표했다.

국악을 향한 외길 열정은 ‘기타 산조’로 이어졌다. 국악의 기악 독주곡 형태인 산조는 가야금·대금·아쟁 등으로 연주한다. 기타로 연주하는 산조는 김수철이 처음 시도한 장르다.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초연한 뒤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등 여러 행사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다음달 공연 1부에서 김수철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기타 산조’를 라이브로 들려준다. 2부에선 선후배 가수들이 ‘못다 핀 꽃 한 송이’ ‘별리’ 등 김수철 히트곡을 부르는 무대도 선보인다. 양희은·김덕수·성시경·백지영·이적·화사가 출연료 없이 함께한다. 공연을 준비하는 김수철을 지난 15일 서울 강남의 한 중식당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

오는 10월1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리는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 포스터.

‘기타 산조’ 국악을 세계로

―다음달 공연을 기획한 계기가 있나요?

“저는 오래전부터 이번 공연을 준비해왔어요. 하지만 국악을 지원하려는 후원자를 찾기 힘들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연기도 됐죠. 코로나19가 좀 진정되고 난 뒤 세종문화회관과 얘기해 공연을 성사한 거예요.”

―어떤 공연을 선보일 예정인가요?

“한마디로 국악이 이끌어나가는 동서양의 오케스트라 연주 공연이죠. 우리 국악이 주인이 되고, 나머지가 서브가 되는 공연입니다. 제가 기타를 치며 지휘도 하고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보여드렸던 ‘기타 산조’도 라이브로 연주해요.”

―국악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1980년 대학교 4학년 때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단편영화 ‘탈’을 만들었어요. 한국 젊은이의 한 단면을 그린 거였어요. 큰 생각 없이 프랑스 청소년 영화제에 출품했는데, 덜컥 본선에 진출했어요. 당시 영화음악으로 국악을 넣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국악을 몰랐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이때부터 국악을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게 40년이 넘은 거죠.”

―국악을 계속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국악은 한국 사람의 정서를 담은 음악이죠. 한번 빠지면 못 빠져나올 만큼 좋아요. 물론 빠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만요.(웃음) 그만큼 매력적인 음악이에요. 이렇게 좋은 국악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연결해주고 싶어요. 그러려면 현재 사람들이 좋아하는 국악을 만들어야 해요. 이걸 달리 말하면 국악의 대중화 또는 현대화예요. 제가 국악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작은 거인’ 김수철씨가 15일 오후 서울 논현동 한 식당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기타 산조’를 직접 만드셨죠?

“네, 제가 직접 만든 거죠. 산조는 여러 가락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선율을 만들어요. 연주자가 자신만의 철학과 정신을 넣어 혼자 연주하는 거예요. 산조가 만들어진 건 100~200여년쯤 됐죠. 국악의 다른 소리에 비해 현대적인 장르인 셈이죠. 이런 산조를 기타라는 서양 악기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야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공연 비용이 꽤 들 것으로 보이는데, 후원자가 있나요?

“제작비는 10억원가량 될 것으로 예상해요. 처음엔 큰 기업 사람들을 만나 우리 국악에 바탕을 둔 공연을 하니 후원자로 나서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죠. 대부분 반응이 없었어요. 대기업 회장님들이 돈에 대한 자존심은 있지만, 우리 문화에 대한 자존심은 높지 않다는 걸 느꼈죠. 그래서 제 사비를 털어 진행하고 있어요.”

―환경미화원·집배원·소방대원을 이번 공연에 무료로 초청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 모셔서 우리 가락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국악은 자주 접하지 않다 보니 거리감이 생기는 거거든요. 자주 듣다 보면 국악을 좋아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많은 분에게 국악 선율을 들려주려고 해요.”

―여러 대중가수와 국악인이 공연에 함께 출연합니다.

“모두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요즘엔 돈이나 비즈니스를 따지는 연예인이 많은데, 출연자로 참여해주는 분들은 모두 출연료 없이 우정으로 함께해요.”

―방탄소년단이 ‘아이돌’이라는 노래에서 국악 장단을 넣기도 했습니다.

“방탄소년단 같은 아이돌이 국악을 결합한 노래를 선보이는 건 정말 좋아 보입니다. 다만 한번에 그치지 말고 계속 시도하고 도전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메가 히트 ‘젊은 그대’ 3분 만에 작곡

그룹 ‘작은 거인’의 공연 모습. 김수철 제공

―밴드 ‘작은 거인’을 결성하며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부모님 반대가 심했어요. 작가는 글쟁이, 화가는 환쟁이, 가수는 딴따라로 불렸을 때니까요.”

―솔로 1집(1983)에 실린 ‘못다 핀 꽃 한 송이’ ‘별리’ ‘내일’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부모님은 딴따라는 안 된다고 하셔서, 공무원이 되려고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마지막이다 싶어, 추억 삼아 앨범을 하나 만든 게 1집이에요. 대학 다닐 때는 주로 록 음악을 했으니, 마지막 앨범은 조용한 발라드 위주로 만들었어요. 그게 뒤늦게 인기를 끌면서 제가 가수를 계속하고 있는 거죠.”

―‘못다 핀 꽃 한 송이’는 2015년 교육방송(EBS)의 ‘스페이스 공감’에서 자막으로 광주민주화운동 등 시대의 아픔을 표현한 노래로 나왔는데요.

“1980년에 그 노래를 만들긴 했어요. 시대마다 해석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요. 그 노래는 시대적 아픔보다 힘들어도 고독해도 외길을 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을 그리며 만들었어요. 앞에서 못한 건 제가 하고 제가 못한 건 후배가 하는 그런 삶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피울 수 있을 거니까요.”

영화 ‘고래 사냥’(1984)에 출연한 안성기(왼쪽부터)·이미숙·김수철씨. 김수철 제공

―1984년엔 영화 ‘고래사냥’에서 주연을 맡았습니다.

“대학교 시절 단편영화를 만들 때 안성기 형을 알게 됐죠. 형이 저를 추천하면서 영화에 출연하게 됐어요. 제가 맡은 캐릭터(병태)가 어리숙하면서 덤벙거리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안성기 형이 ‘고래사냥’의 배창호 감독과 최인호 작가(원작자)에게 저를 소개했어요. 처음엔 네명이 다방에서 가볍게 만나 얘기나 하자고 해서 나갔어요. 그때 최인호 작가가 술이나 먹자고 해서 엄청나게 마시고 난 뒤 술김에 제가 ‘하겠다’고 말했다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했는데, 많은 인기를 끈 영화가 됐죠.”

―1984년 나온 2집에서 ‘젊은 그대’는 국민가요라고 할 정도로 인기였습니다. 대학 응원가로도 활용되고요.

“안양자 작가님이 주신 글에 제가 곡을 붙인 노래였죠. 노래 가사가 너무 좋아서 곡을 만들 때 한번도 수정 안 하고 지은 곡이었어요. 3분 만에 쭉 쓴 노래였어요.”

―그렇게 인기 절정일 때 국악 앨범 ‘황천길’(1989)을 만들었는데요.

“아버지가 그즈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에게 바치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죠. 국악을 바탕으로 한 노래라면 더 좋을 것 같았어요. 그때만 해도 국악에 대해 조금 자신이 있었어요. 그동안 국악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인기를 끌고 있었을 때 하루에 방송만 7~8번씩 나갔어요. 그럴 때도 밤에는 국악 공부를 했어요. 그런 공부를 바탕으로 실험적으로 만든 앨범이었어요. 1984~87년에 작곡한 국악곡들을 담았죠. ‘황천길’에서 태평소, ‘한’에서 아쟁처럼 곡마다 국악기 소리를 강조했어요. 우리 소리와 서양 소리(신시사이저)를 조화시켜보려고 시도하기도 했죠.”

―하지만 대중에겐 낯설었던 것 같습니다. 빚을 많이 졌는데, 1989년 ‘정신 차려’로 재기했죠.

“국악 앨범을 몇개 만든 뒤 진 빚이 2억원 가까이 됐어요. 소속사가 권유해서 해학적인 노래를 만든 게 ‘정신 차려’였어요. 오른손을 쭉 뻗는 안무가 인기였죠.(웃음) 제가 춤을 잘 못 춰요.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를 때 방송사 피디분이 ‘춤을 좀 추라’고 했어요. 당황하다가 중학교 때 배운 체조가 갑자기 떠올라 그걸 흉내를 낸 거였거든요. 근데 그 춤이 화제가 됐어요.”

―1990년엔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의 주제곡인 ‘치키치키차카차카’를 만들고 직접 불렀습니다.

“칫솔질할 때 나는 의성어로 제목을 달았죠. 그 노래를 만들 때 ‘나는 아이들을 위해 한 게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요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였죠. 동요지만 어른을 위해서도 뭔가를 넣고 싶었어요. 그래서 가사에 ‘나쁜 짓을 하면은 우리에게 들키지/ 사랑하며 살면은 평화는 올 거야’를 넣었죠. 이건 어른들을 향한 메시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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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협연한 ‘기타 산조’ 공연. 김수철 제공

“서편제 OST, 국악 앨범 중 유일한 성공”

―그러다 1993년 영화 ‘서편제’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을 맡았는데요.

“‘서편제’가 판소리 영화잖아요. 영화에 판소리가 많이 들어가니, 제가 만들려는 곡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기 힘들었죠. 곡을 쓰지도 못하고 계속 고민만 했어요. 영화 촬영 기간인 5개월 동안 작업했지만, 전혀 못 만들었어요. 촬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임권택 감독이 곡을 갖고 오라고 했어요. 곡을 갖다 드리기 전날 녹음실에 가서 25분간 써 내려간 게 ‘천년학’이었죠. 이 노래가 실린 영화 오에스티는 제가 유일하게 성공한 국악 앨범이 됐죠. 하하하.”

―그 앨범은 70만장 이상이 팔렸습니다.

“처음엔 홍보용으로 몇백장만 찍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본 관객들이 앨범을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소속사에서 500장을 추가로 만들었는데, 하루 만에 다 나갔죠. 그다음 날은 3천장을 만들었는데, 역시 다 나가면서 수천장, 수만장, 이렇게 계속 찍게 된 거였죠.”

―영화음악도 많이 했는데요. 이유가 있을까요?

“영화에선 실험적인 음악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고래사냥’의 메인 테마음악에선 플루트와 국악기 피리를 조화시켜보기도 하고, ‘허튼소리’에선 아쟁을 서양 전자악기인 보코더와 협연해보기도 했죠.”

1986년 아시안게임 전야제 음악감독 시절. 김수철 제공

―1986년 아시안게임 전야제 음악을 맡았는데요.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국악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순수문학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어 보여주는 ‘티브이(TV)문학관’(KBS1)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쪽에서 음악을 요청해 국악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음악을 만들었죠. 그걸 들은 같은 방송사의 또 다른 피디가 대하드라마 ‘노다지’를 만들 때 제게 국악 음악을 요청했어요. 그렇게 국악을 현대화한 노래가 많이 알려지면서 아시안게임 주최 쪽에서도 제게 제안한 거였죠. 그러다 올림픽 음악도 맡게 됐고요. 혼자서 뚜벅뚜벅 길을 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네요.”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같은 여러 방송사의 로고송도 직접 만들었는데요.

“케이비에스와 에스비에스(SBS), 제이티비시(JTBC) 같은 방송국에서 뉴스 프로그램에 들어갈 로고송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이 왔죠. 방송국은 뉴스가 중요하잖아요. 뉴스 프로그램에는 뉴스에 맞게 고급스러운 음악이어야 하거든요. 고급스러운 느낌을 살려 만든 음악이 좋은 반응을 받은 것 같아요.”

―앞으로 계획은 어떤가요?

“다음달 공연은 국악 대중화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국악 대중화의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 이런 공연을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한국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국악과 양악이 어우러지는 무대를 선보일 계획입니다.”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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