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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기울어져 학생 접촉을” 80대 성추행범…재판 뒤 발걸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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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저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법 동영상을 촬영할 이유가 없습니다.” 타인의 신체를 불법으로 촬영한 죄로 법정에 선 남자는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미...

게티이미지뱅크

“저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법 동영상을 촬영할 이유가 없습니다.”

타인의 신체를 불법으로 촬영한 죄로 법정에 선 남자는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미리 준비한 대로 거침없이 말했다. 그런 말을 할 때 그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그의 눈빛도 민망함에 조금은 흔들렸는지는 그가 쓴 검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알 수 없었다. 누가 들어도 실소할 만큼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지만 우선은 그것을 탓할 수 없다. 현대의 형사소송에서는 누구라도 자기 죄를 부인할 권리가 있으니까.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볼펜을 그를 향해 와락 던져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다음 입증 절차를 위해 재판부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형사재판은 증거에 대한 판단으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딱 보기에 명백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증거로 입증하지 않으면 죄를 물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비록 뻔해 보이는 거짓말에 대해서라도 재판을 계속해야 하고, 그사이 법정의 연기자들은 끊임없이 연기를 시도한다.

연기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피곤한

남자에 대한 재판은 몇년이 지나 대법원까지 가서야 확정되었다. 나는 결국 그 재판의 끝을 지켜보지 못한 채 다른 임지로 떠나야 했는데, 훗날 판결문 검색 시스템에서 그에 대한 판결문을 찾아보고 그 방대한 분량에 조금 놀랐다. 그의 말이 안 되는 주장과 허접한 연기에 대해 길고도 촘촘한 판결문을 써 내려가야 했던 재판부의 노고에 혼자서 잠시 경의를 표했다.

그는 왜 숱하게 많은 변론 전략 중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설정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애초에 그다지 효과적인 전략이 아니었다. 촬영물은 ‘○○(피해자 이름)과 나’ 같은 제목이 적혀 일목요연하게 그의 개인 컴퓨터 폴더 안에 저장되어 있었는데, ‘방범용 카메라를 잘못 조작하여 우연히 영상이 찍힌 것’이라는 그의 주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 떠나서, 내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연기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고 있는 사람에게도 실소와 짜증을 자아내지만, 그 스스로도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그 어려운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면 ‘인간은 도대체 어디까지 하찮고 위대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사건 이전에 그의 삶의 궤적이 담긴 전과 기록과, 이 사건 기록에서 나타난 삶의 정황들은 그의 연기 인생이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것임을 보여준다. 그의 인생은 어느 측면에서 꾸준히 거짓이었다. 그는 아주 돈이 많은 사람, 사업을 크게 하는 사람, 종교계에서 신망이 높은 사람 등을 연기해왔다. 그 연기들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연기보다는 조금 나았는지, 속아 넘어간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런 것들로 대단한 부귀나 영화를 취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관객 가운데 누구도 호응해주지 않는 법정에서 홀로 먹히지 않는 연기를 지속해야 하는 고단함과 곧 닥쳐올 감옥에서의 미래뿐이었다. 얼마간의 돈이나 잠시간의 즐거움, 컴퓨터에 저장된 불법촬영물 같은 것을 취하기 위해 인생의 많은 순간을 통째 거짓으로 연기하며 사는 인간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모습과 형태를 달리하지만 비슷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법정의 연기자들을 볼 때면 종종 그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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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증언 더 요구한 뒤…

여기 또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는 3으로 시작한다. (뒷자리 아니고 앞자리… 그러니까 당시 80대) 일제강점기와 해방과 전쟁과 쿠데타와 외환위기와 그 외에도 수많은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관통해왔을 남자는 2020년대에 이르러 법정의 피고인석에 섰다. 남자의 범죄사실은 어느 여고 앞에서 등교하는 여학생들에게 접근해 신체 부위를 만졌다는 것이다. 범행은 몇달에 걸쳐 등교 시간마다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특정된 피해자만 두자릿수에 달했다.

사건이 호명되자 방청석에 앉아 있던 고령의 남성이 몸을 일으킨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쪽은 자녀인 듯한 여성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피고인석에 들어서기까지 법정의 구성원들은 모두 잠자코 그의 기우뚱한 걸음을 지켜본다. 이름을 확인하고 생년월일을 불러보라는 재판장의 요구에 일천구백삼십몇년 ○월○일생이라고 답한다. 작은 몸체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피고인은 고령으로 몸이 불편하여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기울어지거나 팔이 움직이는 증상을 겪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일부 학생들과 접촉하게 된 것을 학생들이 오해한 것 같습니다.”

변호인은 공소사실에 대한 피고인 측 입장을 밝히고, 남자가 심하게 다리를 절고 팔을 흔들며 걷고 있는 영상과, “질환 특성상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중심을 잃거나 팔을 흔들 수 있다”고 말하는 의사의 진술 녹취를 증거로 제출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빠른 걸음으로 보행하다가 제법 큰 도로를 재빠르게 무단횡단하여 학생들의 등굣길 쪽으로 접근하는 모습이 찍힌 시시티브이(CCTV) 영상을 확인했다. 그가 학생들과 접촉한 장소는 학생들이 지름길로 사용하는 야트막한 야산의 등산로였다. 균형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보행이 불편한 사람이 굳이 선택할 만한 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너무 많았다. 이렇게 많은 피해자가 모두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기우뚱하는 것을 추행의 행위로 오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장을 꺾지 않았으므로, 이를 입증하기 위해 피해자인 학생들은 줄줄이 법정에 나와 증언을 해야 했다. 신문해야 할 증인들이 십수명이 넘었다. 학생들의 기말고사 일정을 피해 소환 날짜를 잡느라 재판은 한참 지연되었다. 1학년 학생들이 먼저 법정에 나왔다.

“할아버지가 앞에서 걸어오시는 걸 보고, 제가 옆으로 피했거든요. 충분히 피해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 제 옆으로 오더니 팔을 뻗어서 다리 부분을 터치했습니다.”

“아뇨, 멀쩡하게 걸어오셨는데요. 그때는 다리를 절거나 그러지 않으셨어요.”

“제가 활처럼 몸을 휘어서 피했단 말이에요. 근데도 굳이 팔을 뻗어서 만졌어요.”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은 없었고 그냥 갈 길 가시던데요.”

교복을 입고 법정에 온 학생들은 바르게 서서 선서를 하고 또박또박 진술했다.

한차례 증인신문이 끝나고 재판장은 피고인 측에 나머지 증인들도 굳이 더 나와야 하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피고인은 기존의 입장을 꺾지 않았으므로 다음 기일에는 남은 2학년 학생들을 증인으로 불러야 했다. 그의 재판이 끝나고 다음 재판이 시작되기까지 잠깐의 휴정 시간, 대한민국의 예비 고3을 법정에 불러내야 하는 일이 봉착하게 될 각종 난관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무거워져 잠시 복도에 나가 창밖을 바라봤다. 창 너머로 지팡이를 한 손에 들고 살랑살랑 흔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법원 마당을 빠져나가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아, 진짜…. 시대와 세대를 넘어 다들 정말 이러긴가.

정명원 대구지검 부장검사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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