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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까지 사료 정리한 조선사 연구의 산증인, 미야타 세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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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일본 지바현 마쓰도시의 자택에서 미야타 세쓰코 선생. 필자 제공 일본에서 근·현대 조선사 연구의 산증인이자 생의 마지막까지 사료 정리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보여주었...

2009년 11월 일본 지바현 마쓰도시의 자택에서 미야타 세쓰코 선생. 필자 제공

일본에서 근·현대 조선사 연구의 산증인이자 생의 마지막까지 사료 정리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미야타 세쓰코 선생이 지난달 27일 타계해 10월4일 장례식이 거행됐다. 향년 88.

그는 일본의 대학에서 조선사 강좌가 아예 없었던 시절인 1954년 와세다대 사학과에 들어가 ‘밥 먹고 살기 힘든’ 분야인 조선사를 선택해 평생 고고하게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대학원에 조선사 과정이 있었던 두 대학 중의 하나인 메이지대 대학원에서 박사를 하고 60여년 학계에 몸담았지만 직함은 언제나 강사였다.

‘조선민중과 황민화정책’ ‘창씨개명’ 등의 저서를 통해서만 알던 선생을 직접 뵌 것은 2009년 11월이다. 당시 한겨레신문에서 2010년 ‘국치 100년’ 특집 기획을 준비하던 나는 수십 년째 살고 있다는 지바현 마쓰도시의 자택으로 찾아가 심층인터뷰를 했다. 그후에도 미진했던 부분을 확인하거나 사진 자료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는 마치 실험실 도구처럼 보이는 여과 장치로 우려낸 커피를 내주며 수많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조선으로 치면 자신은 ‘선비’라고 당당히 말했다. 1959년 1월 조선사연구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그는 회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전임자들과 달리 연구회 모임마다 참석해 후학들에게 ‘잔소리’하는 꼬장꼬장한 선배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선생의 삶에서 전기가 된 것은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고백’이었다. 당연히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던 대학 선배 강덕상이 어느 날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공개선언을 하고 나서 미야타에게 조선사 연구를 같이하자고 부추겼다. 이렇게 시작된 강덕상과의 학문적 ‘동지 관계’는 오래 지속됐다.

대학서 조선사 선택 뒤 평생 매진
1959년 조선사연구회 창립 주도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학문적 동지
공로 인정받아 서송한일학술상 수상

총독부 모임 ‘우방협회’와 4년간 토론
800시간 녹음 릴테이프 418개 남겨
‘자료 왜곡될라’ 사료 남기기 공들여

대학 4학년 때인 1957년 졸업논문 주제를 3·1운동으로 호기롭게 정했다가 자료 부족으로 헤매던 그는 옛 총독부 고위 관리들의 모임인 ‘우방협회’란 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곳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던 자료의 보고와 마주쳤다. 총독부 식산국장 등을 지냈고 우방협회를 이끌던 호즈미 신로쿠로와의 만남이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호즈미는 젊은 여대생의 탐구심이 기특했는지 함께 자료를 정리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서열 2위였던 정무총감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20대 젊은 연구자들의 정례 모임이 시작됐다. 미야타의 표현을 빌리면 세대가 다르고 상반된 입장의 참여자가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는 ‘오월동주’의 세미나가 1958년부터 4년간 이어졌다.

논쟁 과정에서 논문의 주제를 하나씩 찾아낸 미야타는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원사료로 모든 논문을 처음 썼고 스스로 했다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앞으로 다른 자료들이 나와도 자신의 논문이 기본적으로는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야타가 말년에 가장 공들인 것은 사료 남기기이다. 옛 총독부 고위직들과의 토론은 모두 녹음돼 대형 릴테이프 418개로 남았다. 약 800시간의 엄청난 분량이다. 그는 이 테이프의 행방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녹음 내용을 왜곡해 식민지지배를 합리화하는 데 활용할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그는 2009년 말 인터뷰에서 “이제 남은 시간이 없으니 논문 쓰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료집을 내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밝혔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사람 중에 이 자료를 능숙하게 활용할 연구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으니 그들을 위해 환경정비를 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2011년 2월 서송한일학술상을 받기 위해 방한했을 때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한 미야타(오른쪽) 선생과 필자. 필자 제공

선생은 조선사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2월 당시 성균관대에 있던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와 함께 ‘한국일본학회’가 주관하는 ‘서송한일학술상’ 공동수상자로 선정됐다. 나는 이 상의 선정 배경에 뜻하지 않게 관여한 셈이 됐다. 한국일본학회의 창립을 주도했던 한 원로 교수가 2010년 1월 초 한겨레에 크게 나간 인터뷰 기사를 뒤늦게 보고 미야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고 직접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선생은 자신이 잘 모르는 학회에서 준다는 상을 받아도 되는지 상당히 고심했던 것 같다.

선생의 오랜 지기였던 강덕상은 2021년 6월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저세상에서 오랜 벗들을 만나 평소와 다름없이 활달하게 정담을 나누리라 믿으며 삼가 명복을 빈다.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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