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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협박·유혹에도 진리와 자유 위해 날았던 ‘고독한 독수리’”

Summary

윤형두 범우사 창립자 빈소. 범우사 제공 윤형두 회장님, 이렇게 인생무상을 상기시키며 기어이 떠나시는군요. 애칭이었던 고독한 독수리처럼 12월3일, 겨울의 찬 하늘로 훨훨 날아가시...

윤형두 범우사 창립자 빈소. 범우사 제공

윤형두 회장님, 이렇게 인생무상을 상기시키며 기어이 떠나시는군요. 애칭이었던 고독한 독수리처럼 12월3일, 겨울의 찬 하늘로 훨훨 날아가시고 말았군요.

출판인이자 출판학 교수, 애서가이면서 장서가를 겸한 데다 범우출판문화재단을 설립, 출판 관련 전공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까지 쾌척해가며 출판문화의 창달에 앞장섰던 분, 서구 지향적인 출판 풍토에서 새 출구 모색으로 중국의 출판계와 각별한 관계를 맺어 마오쩌둥을 비롯해 덩샤오핑 등 여러 선집을 출간한 단행본 출판계의 맏형이었던 윤형두 회장님. 도서 출판 범우사의 사훈인 ‘진리와 자유를 위하여’에 걸맞게 독수리를 심벌로 삼았던 회장님.

회장님은 저명한 수필가에다, 산악인으로도 맹활약하셔서 세계 명산을 두루 올랐지요. 덕분에 노익장을 과시했건만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악화해 가던 중 형님 아우 사이였던 한승헌 변호사가 지난해 4월 작고하자 그 허전함을 못 견뎌 하며 저에게 “우리 죽기 전에 자주 만납시다”라더니 올해 들어 유독 인생무상을 절감하면서 점점 외출이 힘들어졌습니다. 위독 상태와 회복의 낭보를 거듭하면서 정신이 맑아지면 “우리 목소리라도 들읍시다”라는 전화를 무시로 하고, 곧 외출이 가능해지면 꼭 점심 함께하자는 다짐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그예 전화도 못 하신 채 떠나버리신 안타까움.

‘신세계’ 등 기자로 활동하며
김대중 등 야권 거물들과 인연
김상현과 월간 ‘다리’ 펴냈다가

필화 조작 사건 휘말리기도

출판 전공자에 장학금 쾌척하고
중국 선집 등 새 출구 모색한
단행본 출판계의 맏형

회장님의 부음을 듣는 순간, 제 뇌리에는 인간 윤형두의 생애가 요지경처럼 펼쳐집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 일본 고베의 산노미야 역 부근의 바다가 보이는 이층집에서 태어난 당신께서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아버지의 고향 여수 앞바다의 갓김치로 유명한 돌산으로 와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지요. 그래선지 회장님의 수필엔 긴 뱃고동에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배음으로 깔린 서정미가 물씬 풍깁니다.

순천농림고 축산과를 졸업, 동국대 법학과에 들어가는 한편 1956년 아르바이트로 들어간 곳이 월간 ‘신세계’의 기자였지요. 이승만 독재 아래서 조병옥이 부산 피란 시절에 냈던 월간 ‘자유세계’의 후신 격이었던 이 잡지는 당연히 야당지로 김대중(DJ·디제이) 전 대통령이 주간, 편집국장은 시인 전봉건, 역시 시인 박성룡이 선임기자로 있었기에 윤 회장은 이때부터 김대중-김상현의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운명에 얽혀들었을 정도를 넘어 박순천, 오위영, 장면, 윤재술 등 거의 모든 야당 정계 거물들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문단의 기인 천상병과 김관식, 전영경을 비롯한 하근찬 제씨와도 각별했지요.

사월혁명 후 민주당이 집권하자 디제이가 민주당 선전부장이 되면서 당보 ‘민주정치’의 기자로 활약하다가 5·16 후 적잖은 협박과 유혹을 당하면서도 고생길을 택하여 고서점에 투신했지요. 이 헌책방 체험으로 윤 회장은 책 만들기의 매력에 빠져들어 범우사를 창립, 국회의원이 된 김상현과 손잡고 월간 ‘다리’를 펴내게 되었답니다. 둘이서 디제이를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깊은 속내를 숨긴 채 출발했던 거지요. 1969년, 군부독재는 도둑고양이처럼 국회 별관에서 야당 몰래 3선이 가능하도록 개헌안을 통과시킨 뒤라 여론은 어수선했는데, 바로 1971년 대통령선거가 있어 박정희-디제이가 맞대결을 벌였지요.

이때 윤 회장은 디제이 관련 모든 선전 책자와 홍보물, 기념패 일체의 제작 책임을 맡았는데, 이를 방해하려고 일으킨 조작 사건이 ‘다리’지 필화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고, 그 재판을 맡았던 목요상 판사는 온갖 위협과 압력을 뿌리치고 무죄 판결을 내려 결국 판사 복을 벗는 화를 당했지요. 디제이는 대통령 선거 유세 중 이번이 국민의 손으로 선출하는 마지막 대통령 선거임을 강조하며 “청와대에서 만납시다”라고 호소했지만 박정희가 당선, 그 이듬해에 유신독재를 선포해 버렸지요.

1972년 정초, 디제이에게 세배한 뒤 귀가하는 윤형두(오른쪽부터), 임헌영, 김상현 전 국회의원, 한승헌 변호사. 임헌영 제공

회고조차 싫은 저 끔찍한 유신 치하에서 유일한 안식처는 ‘으악새클럽’ 모임이었답니다. 리영희, 장을병, 한승헌, 이상두, 김상현, 윤형두에다 나중 한완상, 김중배, 임헌영 등이 합세했던 이때의 신명 풀이는 아마 윤 회장의 생애 중 가장 통쾌했던 추억으로, 필시 저승에 가시면 먼저 간 선배들이 반가이 맞아주실 것으로 기대됩니다. 지상에서 너무 많은 일로 쌓은 공덕으로 하늘에서는 언제나 통쾌했던 으악새클럽 오락회의 연속이시기를 빕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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