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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신청 공작원 “선량한 이웃들까지 고문당해, 책임감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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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00살을 눈앞에 둔 전직 ‘남파 공작원’이 재심을 신청한다. 공작원인 건 맞지만 수사 과정에서 고문 끝에 허위 자백을 했고, 하지도 않은 간첩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

*편집자주: 100살을 눈앞에 둔 전직 ‘남파 공작원’이 재심을 신청한다. 공작원인 건 맞지만 수사 과정에서 고문 끝에 허위 자백을 했고, 하지도 않은 간첩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니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해달라는 취지다. 본인이 실제 공작원임을 인정하면서 재심을 청구한 첫 사례다.

‘남파 공작원’ 엄주분(98)씨의 변호인단은 6일 대법원에 재심신청서를 제출한다. 변호인단은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국군 수사기관이 엄씨를 수사·체포했고 △장시간 불법체포 구금 상태에서 자백이 이뤄졌으며 △남파 공작원은 맞지만 형법상 간첩죄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씨의 간첩행위 유죄 판결은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사소송법은 ‘공소의 기초가 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경찰이 저지른 직무 관련 범죄에 대한 확정판결이 있거나, 없다면 이를 증명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데, 국군 수사기관이 불법 수사를 했으니 재심 개시가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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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생 김○○은 너무 어렸고, 미군부대 군속 자동차 수리공 장□□, 유리직공 이◇◇는 그런(공작원)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저의 정착에 도움을 준 선량한 이웃들에게 굳이 제가 공작원이라고 털어놓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제가 공작원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자백했고, 저도 거기에 맞춘 답변을 했습니다. 구타와 고문의 결과물이었습니다.”

8월14일과 10월25일 한겨레가 경기 안양의 한 요양원에서 만난 엄주분씨는 98살의 나이에도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또렷이 기억했다. 엄씨는 남파 뒤 정착 과정에서 만난 이들이 자신 때문에 구타와 고문, 실형을 산 것에 대해 “미안하다.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교도소를 나온 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히 봉사하며 삶을 마무리”하려 했던 엄씨가 재심 신청에 나선 이유다. 무기징역형 확정 63년 만, 가석방 44년 만이다.

엄주분 체포 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1959년 7월7일치.

“저와의 만남 때문에 고문을 받고 자백한 그분들의 명예는 지금이라도 회복돼야 합니다. 아마도 이 사건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을 겁니다.” 장씨와 이씨는 간첩방조죄 각각 징역 7년과 5년의 실형을 살았다.

6일 재심 신청서를 대법원에 제출하는 엄씨는 1950년대 남파된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엄씨가 조력자인 김두식 경북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진술서, 오래전 본인의 체포와 조사 과정을 소설처럼 적어놓은 ‘평행선’이라는 기록, 김 교수가 찾아낸 1·2·3심 판결문, 공소장, 공판 및 수사 기록 등을 보면, 엄씨는 194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했다. 남편 박천평은 충남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에서 청년부장으로 일하던 사회주의자였다. 엄씨는 한국전쟁과 함께 빨치산의 길을 선택해 월북했다.

이때 남쪽에 홀로 남겨진 엄씨 딸 예춘은 시어머니의 친딸로 입적돼 키워졌다. 최근 재심 준비 과정에서야 친생자 확인소송을 통해 엄씨의 딸로 바로잡았다.

공주관립여자사범학교(1944년 졸업) 시절. 뒷 줄 맨 오른쪽이 엄주분. 박예춘 제공

실제 엄씨는 평화통일 선전 임무를 띠고 1957년 8월 남파됐다. 하지만 엄씨 앞에 놓인 시급한 과제는 공작이 아닌 ‘생존’이었다. “북한에서 여러가지 계획을 세우고 남쪽에 내려왔지만 막상 공작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아무 인연이 없는 고아(3살)까지 (딸인 것처럼) 데리고 내려와 연고가 전혀 없는 부산에 자리잡아야 했기 때문에 가짜 모녀가 생존할 길을 찾는 것만 해도 힘겨운 과제였습니다.” 엄씨는 1958년 해병대 특무대에 체포되기까지 “간첩 임무 수행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부산에서 엄씨는 자갈치시장에서 노점을 하는 아주머니를 만나 그 집에 머물렀다. 타월공장·테이프공장·연초공장 등에 순차적으로 취업해 7~8개월을 일했으나 수입이 늘 부족했다. 장사라도 하려고 필요한 돈을 마련하고자 1958년 11월 북에서 가져온 달러를 환전하려다 부산 해병대 특무대에 발각됐다.

공주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영명소학교 시절(1940년 졸업).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엄주분이고, 맨 앞줄 왼쪽서 세번째가 엄주분을 사회주의로 이끈 윤영제 선생이다. 박예춘 제공

“공작원으로 활동한 내용은 첫째 휴전선을 넘어 내려온 것, 둘째 여성잡지 ‘여원’에 상담 글을 투고해 안착 소식을 북에 알린 것, 셋째 다른 사람 이름 빌려 도민증을 발급받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수사당국은 엄씨의 연락선을 파악해 대규모 배후조직을 일망타진하는 데 집중했다. 엄씨와 3명의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진 이유다.

“해병대에서는 의자에 잡아매 놓고 무조건 그냥 골격을 때리는 거예요. 아프고, 다 토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물이 흐르는 중에서 하는 거(물고문)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정신없이 전기고문을 하는데… 나중에는 오줌을 누어서 오줌이 여기 얼굴에 묻어가지고 범벅이 돼가지고….” 진술서에 따르면, 엄씨는 체포 뒤 구속영장 발부 시까지 7개월20여일을 불법구금 상태에 있었다. 엄씨는 재판에 넘겨졌고 1·2심 법원은 자백을 근거로 사형을 선고했다. 1960년 8월 대법원은 무기징역형을 확정했다.

엄씨는 고문을 통해 연락선이 노출될까봐 두려워 수사관을 유혹해 “인륜이니 도덕이니 하는 단어를 버리고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진술서에 밝혔다. 수사관들이 연락병을 통해 혼자 있는 방에 뱀을 풀어놓았다고도 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고 진실도 밝힌 터라 생명의 끊을 놓고 담담히 받아들였다고 했다.

엄씨는 진술서 마지막 장에 이렇게 썼다. “저를 고문한 특무대와 정보국 수사관들도, 기소한 검사도, 재판에 관여한 판사들도 대부분 사망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살아서 이런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 때문에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 장□□씨와 이◇◇씨의 명예도 무죄판결을 통해 회복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북한에서 데리고 온 고아 아이의 소식을 알 수 있다면 그에게도 사죄하고 싶습니다. 백세를 눈앞에 둔 이 노인의 뒤늦은 진술서가 진실을 밝히고 과거를 속죄하는 첫걸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엄주분씨의 남편 박천평(오른쪽)의 선린상고 시절 모습. 남한 빨치산 조직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의 외조카인 박천평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충남도당과 함께 덕유산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예춘 제공

고경태 기자

8월14일 안양의 한 요양원을 방문한 김두식 경북대 교수(왼쪽부터), 김진한 변호사, 딸 박예춘씨가 요양원을 떠나기 전 휠체어에 탄 엄주분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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