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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여혐’ 실제 범행으로…‘틀렸다’ 제동 안 한 사회가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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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6일,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열린 시위에 참석한 한 사람이 ‘여성혐오 범죄 아웃’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를 촉구하고 있다....

2017년 8월6일,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열린 시위에 참석한 한 사람이 ‘여성혐오 범죄 아웃’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4일 밤,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본점 외벽에 설치된 전광판에 ‘여성을 성폭행하겠다’는 예고 글이 올라왔다. ‘남초 사이트’(남성 이용자가 대다수인 온라인 사이트)에서나 볼 법한 글이 시민들이 북적이는 공공장소 한복판에 등장한 것이다. 백화점 쪽 고소로 수사에 착수했지만, 경찰은 2주 가까이 지난 27일까지도 용의자조차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지 7년, 여성 대상 폭력(여성폭력) 방지와 피해자 보호를 국가 책임으로 명시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시행된 2019년 이후 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더욱더 대담하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방구석 키보드 워리어’들이 온라인상에서 일삼던 ‘여성 혐오’ 발언이 실제 현실을 위협하는 범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실 위협하는 ‘여혐’ 키보드 워리어

지난 4일, 경남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다. 이날 편의점에서 일하던 20대 여성은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또래 남성으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경찰 조사에서 평소 ‘페미니스트는 여성 우월주의자라, 정신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남초 사이트에서 널리 통용되는 ‘쇼트커트(숏컷)=페미니스트’란 공식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다.

석달 전인 8월, 서울 신림동 등산로에서 출근하던 여성을 성폭행하고 살인한 최윤종(30·신상공개)은 온라인에서 ‘부산 서면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을 보고 이를 모방해 모르는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지난 7월, 경기도 의왕시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여성을 성폭행하려고 무차별 폭행한 20대 남성은 재판에서 ‘군대 안 가는 여성’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등 ‘여혐’이 범행 동기가 됐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최원진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은 이날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누군가 여성을 동등한 존재가 아닌 폭력의 대상으로 보는 이런 성차별적 인식을 또래 집단과의 일상적인 대화나 온라인 공간에서 드러냈을 때, ‘그건 잘못된 것’이라는 적극적인 사회적 개입이 그동안 없었기 때문에, 가해자들이 그런 인식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실제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라며 “이 잘못된 연결고리를 우리 사회가 끊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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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성차별은 망상”이라며 여혐 키워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성평등 실현을 외치는 페미니즘에 ‘남성 혐오’라는 낙인을 찍고 이를 비난하는 백래시 가담자들에게 너무 쉽게 굴복하며, ‘잘못된 신호’를 줬다고 지적한다.

게임업계 등이 ‘갑’인 이용자들의 지속적인 ‘페미니즘 사상 검증’ 논란에 ‘빠른 사과’로 피해 가고 있는 게 대표적 예다. 넥슨은 지난 23일 공개한 게임 홍보 영상 속 여성 캐릭터의 ‘집게 손’ 모양이 한국 남성의 성기 크기를 비하한 것이란 지적이 나오자, 즉각 사과문을 올리고 해당 영상을 비공개 처리했다. 2021년, 지에스(GS)리테일은 편의점 지에스25의 홍보물에서 이런 손 모양이 발견됐다고 일부 고객들이 항의하자 해당 홍보물을 내리고 사과한 것도 모자라, 홍보 담당자들을 징계하기도 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페미니스트를 공격해도 된다는 인식 바탕에는 여성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남성이 사회문화적 권력관계에서 여성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정서가 깔려 있다”며 “문제는 그 같은 인식을 밖으로 공공연하게 표현해도 되는 사회 분위기가 됐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대남’(20대 남성) 담론을 띄우며 성별 가르기로 표심을 사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이런 분위기를 심화시켰다고 비판한다. 김여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국가 성평등 정책을 총괄하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정책 목표로 제시하거나 ‘여성 혐오 또는 성차별은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이라는 주장으로 선거에서 표를 얻는 정치인들의 존재가 성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발화를 공적으로 해도 문제가 없다는 인식을 부추긴다”고 말했다.

여성폭력은 여성만의 일 아냐

여혐이 현실 폭력으로 이어지면서,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은 상수가 되고 있다. ‘진주 편의점 쇼트커트 여성 폭행 사건’을 계기로 최근 성신여대와 동덕여대, 서울여대 등 일부 대학에서 여성 혐오 범죄를 규탄하는 집회가 잇따라 열린 것은 이런 불안감을 반영하고 있다. 직장인 김아무개(33)씨는 “나도 머리가 짧으니까 ‘누군가한테 이유 없이 맞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며 “‘나도 언젠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늘 있다”고 말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최근 ‘여성폭력 추방 주간’(11월25일~12월1일)을 맞아 “가정폭력, 교제폭력, 스토킹, 디지털 성범죄 등 폭력에 단호히 대처하고 피해자를 빈틈없이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겠다”며 여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지원 강화를 약속했다. 하지만 사후적 대처만을 강조하고, 여성폭력 예방을 위한 인식 개선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여가부가 내년도 예산안에서 여성폭력 방지, 피해자 지원 및 성평등 의식 확산을 위한 사업 예산을 대폭 삭감한 터라, 발언에는 무게가 실리지 않았다. 김수정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으로부터 여성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했던 사건들을 보면 피해자 본인뿐만 아니라 피해자 주변인(부모, 자녀, 친구 등)도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여성폭력은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협하는 문제”라며 “정부가 성평등 실현에 무관심하다면 여성폭력을 막기 위한 사회적 비용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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