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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명 봉기한 1946년 영천…진실규명 보류된 6명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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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 본인 제공 “전시에는 재판 없이 죽일 수 있다”는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의 말은 법을 초월해 생명권 박탈을 정당화하는 ...

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 본인 제공

“전시에는 재판 없이 죽일 수 있다”는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의 말은 법을 초월해 생명권 박탈을 정당화하는 무도함으로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한편으로는 발언의 계기가 됐던 경북 영천에서의 대규모 학살과 그 배경이 됐던 ‘10월 사건’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김상숙(61)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한국에서 10월 사건과 영천에 관해 가장 연구를 많이 한 학자다. 1기 진실화해위(2005~2010)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1946년 10월 사건을 비롯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등 영천에 관한 보고서를 세건이나 썼다. 400여명을 만나 증언을 들은 결과다. 진실화해위를 나와서도 생존자와 우익 청년단원·경찰·입산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구술 조사를 해 2016년 ‘10월 항쟁’을 냈다. 그에게서 영천 이야기를 들어봤다.

1946년 10월2일 대구 현장. 대구의 불길은 2일 밤부터 영천으로 옮겨붙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지난 10월31일 진실화해위는 전체위원회를 열어 영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사건 희생자 21명 중 6명을 표결 끝에 진실규명 보류 처리했다. 영천경찰서의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1979) 처형자 명부에 기록된 “ 10.1 사건에 가담 살인 , 방화 약탈 등 좌익활동하다가 처형된 자”라는 문구 등을 여당 추천 위원들이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말했다. “이건 생존자와 유가족 감시하고 연좌제 적용하기 위해 만든 자료예요. 처형 사유 기록할 때 문구 몇 개 정해서 랜덤(무작위)으로 쓴 거 같아요. 300여명이 다 비슷비슷해요. 9살이던 정립분도 암살·방화범으로 기록됐으니.”

1946년 10월 대구의 시위 군중. 대구의 불길은 2일 밤부터 영천으로 옮겨붙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46년 10월2일 대구경찰서 앞에 주둔한 미군 장갑차.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경찰 기록에 등장하는 ‘10·1 사건이란 무엇일까. 뭐라고 불러야 정확할까. “사건 당시에도 관점에 따라 항쟁·폭동·소요 등으로 불렀죠. 진실화해위는 ‘사건’이라 했고요. 1기 진실화해위 막판에 당시 김용직 상임위원이 ‘폭동’이라 규정하고 사건 참여자를 ‘폭도’라 하면서 보고서에 쓰라고 했어요. 끝까지 이를 거부하여 통과시켰어요.”

진실화해위 보고서를 보면, 10월 사건이란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 등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들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다. 1946년 10월1~2일 대구를 기점으로 발생해 인접 군·면 지역으로 전파됐는데, 영천의 항쟁 강도가 상당히 높았다.

3일 새벽부터 수만 명이 봉기해 읍내를 포위하여 통신망을 절단하고 군청, 경찰서, 우편국, 재판소 등과 지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해 불태웠다. 군수 이태수가 살해됐고 대지주 이인석의 집이 공격당했다. 시위는 남한 전역으로 번져 73개 시군에서 동학농민운동이나 3·1 운동에 버금가는 규모로 일어났다.

1950년 7월16일 제25사단 방첩대가 정보원으로부터 영천의 국민보도연맹에 관한 정보를 인터뷰하여 사단 G-2에 보고하면서 1946년 10월 사건과 국민보도연맹 조직의 관련성을 설명한 문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경찰 진압과 함께 민간인이 상당수 살해됐다. 영천에서는 1946년 12월 기준 600여명(경북 전체 7400명)이 경찰에 검거됐으며 이중 9명이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선고받았다. “대구엔 식량난과 함께 콜레라가 창궐했죠. 경북 농촌엔 지주-소작 관계 불만도 높았어요. 하지만 대구·경북에 한정해서 보면 안됩니다. 1946년 9월23일부터 전국에서 총파업이 일어났고 대구·경북에는 항쟁이 이어서 일어났는데, 다른 지역으로 퍼졌죠. 전라도에선 이 사건을 ‘추수 봉기’라 부르기도 하죠. 다음해인 1947년 삼일절에도 전국적 시위가 일어나고요. 제주에서는 시위 군중을 살해해 제주 4·3의 도화선이 됐어요.” 한국전쟁 때까지 전국을 강타했던 거대한 민중항쟁의 출발점이 됐다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10월 사건은 여순사건이나 제주 4·3에 비해 규모가 컸으나 덜 알려졌고 국가적 진상규명 활동도 미미했다. 김 교수는 “항쟁은 1946년에 일어났는데 사건 관련자들은 한국전쟁에 주로 학살돼 참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또 민중 봉기 측면이 강조되면서 보수적인 대구·경북에서 이념적 프레임도 더 심하게 씌워졌다”고 말했다.

1946년 10월2일 대구 사건 현장에서 피살된 이들의 시신 모습.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영천에서는 경찰 탄압을 피해 산으로 간 청년들이 1948년 초 경북에서 처음으로 남로당유격대를 조직해 팔공산·보현산 등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한다. 지역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산에서 무장투쟁을 했던 ‘산군’이 있었다면 마을에서 생활하던 청년들이 ‘산군’들에게 동원됐죠. 이들은 경찰 하부조직인 민보단 경비 서는데도 동원됐어요. 양쪽 다 동원된 셈이죠.” 영천에서는 한국전쟁 전 군경의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이미 비무장 민간인 600여명이 희생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영천에서 학살된 민간인 숫자와 비슷하다.

“이번에 진실규명 결정이 보류된 6명은 유격대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또는 ‘산군’에게 동원됐다가 자수해 그 가담 정도가 경미해서 처벌받지 않고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처형됐을 가능성이 커요. 지금 진실화해위는 이분들이 법적 절차 없이 희생됐는지 확인하는 것보다는, 1970년대에 작성된 경찰 기록을 근거로 진실규명 대상에서 배제하는 데 주력하는 것 같습니다.”

대구 출신인 김 교수는 마지막으로, 올해 10월 대구에서 ‘10월 항쟁을 기억하는 시민모임’이 발족했다고 소개했다. 이제 ‘10월 항쟁 기억운동’이 제대로 일어났으면 좋겠다면서, 여기엔 당연히 영천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진실규명이 포함된다고 덧붙였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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