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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온몸으로 독재·분단 맞선 늦봄 문익환의 담대함 기억했으면”

Summary

내년 1월18일은 한국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거목인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 별세 30년이다. 고인은 유신 시절이던 1975년 친구 장준하 선생의 의문의 죽음을 목도하...

내년 1월18일은 한국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거목인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 별세 30년이다.

고인은 유신 시절이던 1975년 친구 장준하 선생의 의문의 죽음을 목도하고 만 58살이던 1976년에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인생 후반부 18년의 11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목놓아 외치다 6차례나 옥고를 치른 것이다. 1989년에는 정부와 사전협의 없는 방북을 결행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두 차례 회담을 하고 공동성명까지 발표해 국내외에 파문을 일으켰다.

재작년 출범한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이사장 송경용 신부)는 지난 달 12일 ‘늦봄30주기 기념위’를 발족하고 미술, 음악, 신학·학술, 노동·인권, 출판, 청년·미래 세대로 분야를 나눠 다양한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반도평화선언문 발표(1월18일)와 통일염원대회(4월27일) 외에도 미술 쪽에선 고인이 난 땅인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와 함께하는 한중 미술전시회를, 음악은 고인의 통일 의지를 미래 세대에게 알리는 ‘스토리 뮤지컬’을, 출판 쪽은 고인의 생명평화 사상이 중심이 된 출판물 간행 등을 추진한다.

고인을 잘 알지 못하는 청년·미래 세대를 위한 “‘벽문박차’(벽을 문이라고 박차고 나가는 사람)-나의 해방일지” 프로그램도 기획했다. “‘벽문박차’는 문익환 목사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에 나오는 시구에서 따왔죠. 젊은 세대가 집세나 자녀 교육, 양육 등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벽을 극복해나가는 스토리를 응모하면 짧은 동영상과 책으로 만들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요즈음 청년 세대가 좌절감을 느끼는 데는 정신적 가치 상실 탓도 있어요. 문 목사의 벽문박차 정신이 미래 세대의 푯대가 되면 좋겠어요.”

고 문익환 목사.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27일 서울 합정역 근처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사무실에서 고인의 셋째 아들 문성근 배우와 함께 만난 송 이사장의 말이다.

30주기 프로그램이 다채롭다고 하자 송 이사장은 이렇게 받았다.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분(문 목사)이 원체 풍성한 삶을 사셨거든요. 목사이자 신학자이면서, 한국 기독교계의 역사적 사건이기도 한 성서 번역도 하셨죠. 이 성서는 한국 성공회 교단과 개신교 일부가 지금도 쓰고 있어요. 또 통일운동가이자 민주인권운동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셨죠. 관여한 각 분야에 간단치 않은 영향을 끼치셨어요.” 그는 30주기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늦봄의 삶과 생각을 미래 구상의 푯대로 삼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문성근 배우는 기념위 발족식에서 ‘한국 사회운동의 각 부문과 단체가 문 목사를 활용해 역사를 밀고 나가자’고 말했다. 어떤 의미일까? “이번 기회에 여러 부문이 다 모여 연대하자는 말이죠. 그동안 전체를 아우르는 자리가 드물었잖아요.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역사를 밀고 가야죠.” 송 이사장도 거들었다. “지금 시대가 전쟁 위기에 반평화, 반민주, 반생명 등 총체적 위기 상황인데 각 부문이 각자 대응만 하고 있어요. 지난 30년 사회운동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각 영역의 전문성은 깊어졌지만 대신 부문으로 쪼개져 서로 연결이 되지 않고 있어요.”

문 배우는 30주기가 1989년 문 목사 방북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도 했다. “문목(고인)이 방북한 데는 당시 동서 냉전이 끝나가고 옛 소련이 흔들리면서 우리에게 절호의 통일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게 컸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 기회를 흘려보내고 어려운 국면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저는 우리가 통일로 가는 데는 얼마나 자주적인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느냐가 관건이라고 봐요. 이번 행사가 그런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송 이사장은 “현 정부 들어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국제 정치에서 남한 정부가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민간의 통일에 대한 인식도 우려할 만하다”면서 “이런 시기에 (통일을 향한) 문 목사의 담대한 행동이 갖는 의미를 되짚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고인의 10주기에는 북한 대표단도 추모행사에 참여했다. 이번에는 어떻냐고 하자 문 배우는 “요즘 상황이 예민해 (남·북이 함께 추모식을 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면서도 “어찌 되었든 북쪽에 30주기 행사에 참석해달라는 의사 전달은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성공회 신부인 송 이사장은 2010년에 특정한 예배당이 없는 ‘걷는 교회’를 세워 신도들과 만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부름이 있는 곳을 자주 찾아 거리에서 미사를 드린다. 문익환 목사와의 첫 인연을 묻자 그는 신학대 입학 전에 연세대 건축학과를 다니던 70년대 말부터 한빛교회와 향린교회 등 교회와 집회 현장에서 늦봄의 설교와 강연을 들었다고 했다. 80년대 후반에는 고인과 함세웅 신부, 지선 스님 등과 함께 종교인회의 활동도 했단다. “문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걷는 교회가 고인의 집 보수와 자료 등 유물 정리를 도왔어요. 그 인연으로 사업회 이사장까지 맡게 되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늦봄과의 시간을 묻자 그는 고인이 별세하기 직전 종교지도자들과 같이 만났던 장면을 떠올렸다. “서울 흑석동 원불교 회당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모였어요. 당시는 특정 종교의 성지 개발 문제로 종교간 갈등이 있었어요. 그날도 종교인들 사이에 불편한 목소리가 나왔어요. 이를 보고 문 목사님이 거의 울먹이면서 ‘우리가 남북과 동서로 갈라진 것도 원통한데, 종교인들까지 갈라지면 우리 민족의 희망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최근 ‘늦봄30주기 기념위’ 발족
1월18일 맞춰 평화선언문 등 준비
신학자·통일민주인권운동가·시인 등
삶만큼 추모 프로그램도 다채롭게

송 신부 “우리와 종, 차원이 달랐던
늦봄 삶·생각 미래세대 푯대 됐으면”
문 배우 “이번 기회에 다 모여 연대
다시 전열 정비해 역사를 밀고 가야”

그는 문 목사를 두고 “우리와 종도 다르고 차원이 다른 사람 같았다”는 말도 했다. 뭔말일까? “그분에게는 대륙적 풍모가 있었어요. 남과 북을 넘어 저 만주 대륙까지 우리 민족의 지리적 공간으로 생각하셨죠. 그래서 한반도를 갈라놓고 가지 못하게 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거죠. 김일성 주석을 만날 때도 확 껴안아 버렸잖아요. 앞서 김 주석을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 김 주석에게 고개를 숙였던 것과 크게 달랐죠. 그분은 위기 상황에서 온 몸을 던져 예언자적 행동을 하고 비전을 제시하셨어요. 그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너무 쪼그라들었어요. 자기 영역과 진영에 갇혀 있죠.”

문 배우는 아버지가 뒤늦게 민주화 운동에 나설 때부터 ‘동지’였다. 고인이 친구인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직후 친구의 유고집을 낼 생각으로 장준하의 사상계 사설을 모아보라고 시킨 이도 성근이었다. 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늦봄이 군사재판을 받을 때는 성근이 형 의근과 함께 교대로 법정에 들어가 재판 때 나온 이야기를 모두 외워 기록을 남겼다. 당시 법정에는 필기구와 녹음기 지참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부친에 대한 존경심을 “격이 다르다”는 말로 나타냈다. “문목이 처음 구속되고 78년에 풀려났을 때 환갑이었어요. 그때 제가 감옥에 그만 가시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자서전 집필을 권했어요. 그 말에 문목이 대단히 한심하다는 듯 저를 보시더군요. 그 뒤 문목이 잇달아 구속되는 것을 보면서 절대 물러설 분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죠.”

그는 부친이 여섯 차례 옥고를 치르는 동안 단 한 차례도 고문을 받지 않았다면서 거기에는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죽음까지 각오하는 마음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80년 내란음모 사건 때 계엄사 합수부의 한 수사관이 온갖 고문 기구가 있는 지하 조사실로 문목을 데리고 가 ‘협조를 안 하면 여기 며칠 계셔야 한다’고 협박했답니다. 그때 바로 문목이 ‘그래라’라고 답했다고 해요. 만약 답을 하는 그 순간 약간이라도 동공이 흔들렸다면 고문을 당하셨을 겁니다. 미동도 없으니 수사관이 고문도 소용 없을 것이라고 본 거죠. 문목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 때부터 ‘장준하를 죽였으니 나도 죽여라’는 마음이었어요. 얼마 전 전주의 한 약사님이 83년에 문목이 써준 서예를 보관하고 있다고 해서 가서 보니 글귀가 ‘깨끗한 죽음을 살다’이더군요.” 그는 지선 스님 전언이라면서 “문목은 투신과 분신이 많던 시절에 주검이 안치된 병원을 찾으면 관을 열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주검을 껴안고 우셨다”는 말도 했다.

부친이 뒤늦게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을 때 셋째 아들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저도 문목 생각에 완전히 동의했죠. 장준하 선생 글을 모아보라고 하셨을 때 나에게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주시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는 이런 자신의 생각에는 조부모(고 문재린·김신묵)의 영향도 있다고 했다. “우리 집은 식사 시간에 늘 기독교식 기도를 했어요. 그때마다 조부모님은 민족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죠. 문목은 식사 시간에 아름다운 우리말 이야기도 많이 하셨어요.”

부친의 ‘뒤늦은 민주화 운동 바람’으로 자신의 삶이 바뀐 게 있다면 뭔지 문 배우에게 물었다. “제가 현실 정치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2012년 총선에 출마했고 정당 최고위원도 지냈다. “저는 87년 대선 때 문목이 김대중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해서 결과적으로 야당 패배로 귀결된 것은 문목의 인생에서 비판 꺼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택으로 동서 지역 갈등도 악화했고요. 제가 동서 갈등 극복을 구호로 내건 정치인 노무현을 도운 것은 국민에게 문목이 진 그 빚을 갚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죠.”

아버지와 언제 가장 행복했냐는 물음에는 “기억이 없다. 가슴 아픈 것들뿐”이라고 답했다. “문목이 한 강연에서 팔을 180도로 완전히 펼친 사진이 있어요. 그 모습에서 문목이 한겨울에 물을 맞고 서 있는 이미지가 겹쳐 보여 마음이 아픕니다.”

인터뷰를 끝내며 지금 늦봄이 살아있다면 어떤 메시지를 낼 것 같냐고 묻자 송 이사장이 답했다. “이런 쪼잔한 놈들아, 호통을 치시겠죠. 해방 직후에는 우리 능력이 없어 결국 분단이 되었잖아요. 지금은 우리 능력이 그때와는 다른 데, 알면서도 반민족적 행태를 보이고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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