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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여성들이 말하는 존엄…“차별 없고 자존감 있어야 해요”

Summary

지난달 31일 저녁 광주광역시 동구 예술의 거리. 해가 짧아진 탓에 7시가 채 안 됐는데 어둠이 내려앉았다. 행인이 드물어 적막감이 돌던 골목의 작은 건물 2층에 여성들이 삼삼오오...

지난달 31일 저녁 광주광역시 동구 예술의 거리. 해가 짧아진 탓에 7시가 채 안 됐는데 어둠이 내려앉았다. 행인이 드물어 적막감이 돌던 골목의 작은 건물 2층에 여성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약 40평(132㎡) 넓이의 탁 트인 공간이 금세 반가운 인사와 수다로 가득 찼다. 대부분 우리말이었지만 몇몇 사람은 외국어를 썼다. 서로 알던 사람도 있었고 처음 만나는 사람도 많았다. 광주 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소장 박흥순)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번째로 마련한 ‘광주 이주민 인권 포럼’ 자리였다.

참가자들의 모국은 한국뿐 아니라 몽골·베트남·우즈베키스탄·중국·캄보디아·필리핀 등 다양했지만, 대다수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외국인을 나누는 게 모호했고 의미도 없었다. 한 개인의 정체성이 출생국과 시민권으로 정의되는 것에 의문을 던지고 경계를 지우는 만남이기도 했다. 사전에 참가 신청을 한 이주민 25명과 선주민(한국 출생 국적자) 22명, 모두 47명이 모였다. 이주민들의 모국어와 피부색은 달랐지만 몇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한국 남성을 배우자로 선택한 결혼 이주 여성. 모든 게 낯선 한국땅 지방 도시에서 언어·문화·풍습·법과 제도의 장벽을 넘으며 분투하는 삶. 모국인, 한국인, 엄마, 주부, 직장인,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 새로운 삶을 일구는 사람. ▶관련기사= ‘나의 두 번째 나라’ 한국에 하고픈 말

파키스탄 노동자와 결혼한 선주민 여성

이날 포럼은 ‘빵과 장미―생존할 권리와 존엄할 권리’를 주제로 두 시간 넘게 이어졌다. 박흥순 소장이 환영 인사에 이어 포럼의 취지와 진행 방법을 설명했다. “‘빵’은 인간이 삶을 이어가는 생존, ‘장미’는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을 상징합니다. 이 자리에는 이주민과 선주민이 함께 모였습니다. 발제자께서 간략히 주제 발표를 한 뒤, 참가자들이 자기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실천 방안도 토론할 겁니다. 일방적 강연이 아니라 모두가 말하고 들으며 서로 배우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인사말을 마친 박 소장의 손에 조그만 핸드벨이 들려 있었다. “한국에서 ‘생존할 권리, 존엄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먼저 떠난 이주자분들이 많습니다. 또 엊그제(10월29일)는 159명의 젊은이가 국가의 무책임으로 목숨을 잃은 이태원 참사 1주기였습니다. 잠시 그분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진 뒤 포럼을 시작하겠습니다.” 댕, 댕, 댕~ 은은한 종소리가 세번 울렸다. 다소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잠깐의 침묵이 깊고 길었다.

지난달 31일 광주 동구 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에서 ‘빵과 장미- 생존할 권리와 존엄할 권리’를 주제로 열린 제2회 광주이주민인권포럼에서 정혜실씨가 주제 강연을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경기도 안산의 공동체 라디오 ‘단원 에프엠(FM)’의 정혜실 본부장(이하 호칭 생략)이 40분가량 주제 발표를 했다. 노동과 체류 자격, 노조 할 권리, 예술 할 권리, 목소리를 낼 권리, 경제적 자립의 중요성, 이주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정치할 권리 등을 설명했다. 발표나 강의라기보다 사례와 경험을 중심으로 실질적인 정보를 알려주고 격려하며 공감을 나누는 이야기보따리였다. 그는 앞서 지난 9월 자신의 이주민 인권 활동 경험을 담은 ‘우리 안의 인종주의’(메멘토)라는 책을 막 출간한 참이었다.

정혜실이 “저는 한국 태생이지만 여러분처럼 외국인 남자와 결혼했어요. 제 남편은 파키스탄 출신 노동자였어요”라고 운을 뗐다. 참가자들은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귀를 기울였다. “저는 1994년에 결혼했는데 남편에게 주민등록증이 바로 나오지 않는 거예요. 한국인 남편-외국인 아내가 아니라서 생기는 차별이었죠. 파키스탄 사람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어떤 할머니들은 ‘한국 남자도 결혼 못 하는데 왜?’라며 화를 내시기도 했죠.(좌중 웃음) 저는 가부장제, 남성 중심 한국 사회에서 외국 남자에게 ‘시집을 간’ 사람이었어요. 호주제가 폐지되고 가족관계등록법(2007년)이 생기기 전까지 제 아이 두명도 ‘외국인’이었고, 저는 다문화 가정에서 오랫동안 ‘혼자’였습니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하다가 여성학·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이주민 인권과 인류의 인권이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참가자들 사이에 ‘아~’ 하는 공감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혜실이 물었다. “한국에서 결혼 이주 여성은 보통 어떤 이미지인가요?” 몇가지 대답이 나왔다. “돈 주고 사 왔다”, “위장 결혼”. 이번엔 씁쓸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정혜실이 “맞아요, 매매혼. 그런데 한국 사람끼리도 결혼정보업체들이 재산, 직업, 사회적 지위, 이런 거 다 따져서 점수를 매기고 상품이 돼요. 그런 게 매매혼이죠. 저는 제 남편을 정말 사랑해서 뭣도 모르고 결혼했어요”라고 말해 다시 웃음이 쏟아졌다.

“그런데 국제결혼을 하고 나니 힘든 게 너무 많았어요. 제도가 미비했던 거죠. 한국에 온 이주 여성들은 더 힘들죠. 그래도 점차 시민단체들과 연대가 싹트고, 이주 여성들도 ‘내가 선택해서 왔다’, ‘내 삶을 다른 세계에 가서 개척하는 도전이다’라는 주체적 능동적 생각으로 바뀌어 왔어요.” 다시 ‘아~’ 나지막한 탄성이 화음처럼 울렸다.

취업과 노동권도 절박한 관심거리

결혼 이주 여성들이 정혜실 단원에프엠(FM) 본부장의 주제 발표를 들으며 내용을 앱으로 번역하거나 메모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정혜실이 이주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주거 환경 실태와 그에 맞선 권리 투쟁의 사례들을 말할 때도 참가자들은 숨을 죽였다. 누군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메모했다. 취업과 노동권은 결혼 이주 여성들에게도 절박한 관심거리였다. “차별이 있다면 개선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나를 무시하는 거잖아요. 누군가는 그걸 싸워야 할 문제로 보고 싸웠어요. 긴박할 땐 권리가 잘 안 보이고 ‘월급 주는 게 어디야’라며 포기할 수 있지만, 결혼 생활이 자기를 지키는 것에만 머물러선 안 되죠. 우리 스스로 생존할 권리뿐 아니라 존엄할 권리를 위해 서로를 돌보고 연대의 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발제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3개의 모둠으로 나뉘어 ‘생존할 권리를 위해 필요한 것’과 ‘존엄할 권리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말에 능숙한 이도 있었고, 많이 서툰 사람도 있었지만, 장벽이 되지 않았다. 한 모둠에선 중국 태생의 한 여성이 휴대폰에 깔린 통번역 앱과 사전을 봐가며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다른 모둠에선 우즈베키스탄 태생의 여성이 한국말을 거의 못해 통역자의 도움을 받았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고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갇혀 있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지난달 31일 광주 동구 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에서 ‘빵과 장미- 생존할 권리와 존엄할 권리’를 주제로 열린 제2회 광주이주민인권포럼에서 장지예씨가 조별토론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모둠 1

“일자리가 중요해요.” “사람과의 관계.” “내가 자발적으로 (권리를) 탐색해야 해요. 그러면 보장된 것을 이해할 수 있어요.” “공평한 의료 혜택이요.” “내가 가진 능력을 어디서든 펼칠 수 있어야죠.” “저는 한국말 안 잘해요(서툴러요). 이민 여성들이 한국 와서 경제 문제 많아요. 음음… 어떻게 말해야지? 한국말 어려워요. 우리 신랑이 술·담배 줄이면 좋겠어요.”(좌중 웃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요.” “생존하기 위해 의식주는 일차원적이에요. 정보 접근성이 중요해요.” “미등록 친구들이 한국어 배우고 싶어도 어디서 배우는지 몰라요.” “안전한 업무 환경이요.” “(취업 계약에) 정규직·계약직 있는데, 오래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줬으면 좋겠어요.”

#모둠 2

“존엄이라는 말 어려워요.” “존엄할 권리는 나다운 것, 사람다운 것을 말해요.” “다른 사람이 저를 인정하는 것이죠.” “자존감,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중요해요.” “평등. 위계를 짓지 않는 것이요.” “나부터 자신감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존중받으려면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해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피부색 까맣다는 이유로 차별이 없어야 해요. 자녀까지 무시받고 이런 것 없어야 해요.” “우리가 더 열심히 지식을 쌓아야 하고 법을 알아야 해요.” “욕설을 듣고 차별을 받았을 때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는 (법과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가야 해요.”

#모둠 3

“안정적인 일자리와 수입이요.” “대인관계와 소통.” “우리도 살 물건이 있고 필요하면 돈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남편이나 시댁 가족들의 지지가 필요해요.” “공과금 어떻게 내는지, 일자리는 어떻게 찾는지, 일상의 정보가 필요해요.” “평화! 한국이 전쟁 나면 어떡해요? 이주자들도 살 수 없잖아요.(좌중 웃음) 평화로운 세상이 필요해요.” “자신감이요, 사람이 자신감 없으면 자꾸 위축되니까요.” “쉼이 있는 여가 시간도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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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서로 달라서 좋다” 그리고 “함께”

마지막 순서인 문답과 종합토론은 모든 참가자가 큰 원으로 둘러앉아 진행됐다. 한 이주 여성이 정혜실에게 물었다. “외국인과 결혼해 사는 어려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공감해요. 힘들 때 무엇에 의지했어요?” 정혜실이 “신혼집 단칸방이 둘이 발을 뻗기도 힘들 만큼 좁고 가난했지만 힘든 줄도 몰랐죠. 여러분,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 알죠? 사랑의 힘이 무섭긴 하더라고요. 제정신이 아닌 거죠”라고 말해 폭소가 터졌다.

“그런데 점차 (다문화 가정이 맞닥뜨리는) 현실이 보이더라고요.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어요. 한국인 활동가와 이주 여성들을 만나고 일을 하면서 훨씬 더 자신감을 얻었어요. (차별과) 싸울 수 있고 이길 수 있다, (법과 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권리는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눈물, 밤샘했던 시간이 모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날 포럼의 마무리는 모든 참가자가 포럼에서 느낀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는 시간이었다. 잠시 생각한 뒤 차례로 나오기 시작한 낱말들은 따뜻하고 충만했다. 또 겹치는 낱말이 거의 없을 만큼 다양했다. 설렘. 가벼움. 신기하다!(모두 웃음) 존중. 평등하다. 가치. 깨달았다. 서로 달라서 좋다. 후회하지 않는다. 잘한 선택. 성장. 관심. 도움 됐어요. 원더풀!(모두 웃음) 공감. 목소리. 희망. 성찰. 잘 왔다. 뿌듯하다. 소중하다. 보름달. 과정. 재밌다. 맛있다. 맘에 들었다. 생(삶). 나. 기회. 따뜻함. 공감. 고맙습니다…. 맨 마지막에 나온 단어는 ‘함께’였다.

앞서 “갈 길이 멀다”고 말한 참가자도 있었다. 김예진씨는 광주 북구 가족센터에서 올해 6월부터 다문화가정 업무를 맡고 있다. “제가 무심코 ‘불법 체류’라는 단어를 썼다가 ‘불법’이 아니라 ‘미등록’이라고 표현해야 한다는 걸 오늘 배웠어요. 현업 종사자인 제가 단어 하나도 잘 몰랐다는 게 울림이 컸고,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주자를 향한 우리 사회의 시선부터 비자 정책까지 부족한 게 너무 많다, 앞으로 해나가야 할 과제가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념사진 촬영을 위해 겹겹이 키맞춤을 한 참가자들이 “평화~”라는 외침과 함께 환하게 웃었다.

박흥순 광주 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 소장 인터뷰

“선주민과 이주민, 동등한 관계 비추고 깨닫는 게 진정한 앎”

박흥순 광주 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 소장이 제2회 광주 이주민 인권 포럼 참가자들에게 포럼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선주민이 이주민과 만나고 돕는 건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가르치려 든다면 ‘폭력’이죠.”

박흥순(59) 광주 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장은 “광주 이주민 인권포럼은 서로 동등한 관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을 상대방에 비춰보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에듀케이션’이 가르치는 것이라면 ‘페다고지’는 스스로 비추고 배우며 깨닫는 거죠. 그게 진짜 ‘앎’입니다. 오늘 포럼에 오신 분들이 집에 돌아가서도 많은 생각을 할 겁니다.”

박 소장은 서울 출생이다. 서울의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석사)을 공부한 뒤 영국 버밍엄대에서 ‘탈식민지 성서해석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2001년부터 10년 동안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광주가 그의 새 삶의 현장이 된 것은 우연 같은 필연이었다. “2011년 한국연구재단이 개인 연구자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3년 계약 학술연구교수 프로젝트에 선정됐습니다. 광주 호남신학대에서 ‘광주·전남 지역 이주민 현황과 지역 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연구하면서, 광주 지역의 이주민 권리 활동가들과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민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죠. 연구 프로젝트를 마치고 2014년에 서울로 돌아왔는데, 광주에서 계속 이주민 권리 운동을 함께하자는 활동가들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이듬해 박 소장은 “서울에서 다 버리고 광주로” 오기로 결심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좋은 사람들과의 네트워킹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포스트콜로니얼 연구를 한 학자로서 중심과 주류만 좇는 연구 관행을 벗어나 로컬(지역)의 가치를 실현하기. 셋째, 광주 5·18 민중항쟁에 대한 부채 의식이랄까, 그 의미를 확장해보자. 처음엔 저만 왔어요. 아내는 ‘당신이 광주에서 뿌리내리고 잘하는지 3년을 지켜본 뒤 오겠다’고 했는데, 결국 3년 뒤에 합류했습니다.”

박 소장이 혼자 다시 광주에 온 첫해인 2015년, 광주에서는 연례 국제포럼인 제5회 세계인권도시 포럼이 열렸다. 광주시는 이주민 기관 대표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포럼에 처음으로 ‘이주민과 인권’ 주제를 포함시켰다. 박 소장은 광주항쟁 제40주년이던 2020년 포럼 때는 이주민 관련 발제문들만 따로 모은 자료집 ‘5·18과 이주민, 그리고 인권도시’를 한글과 영어, 베트남어, 필리핀어, 우즈베키스탄어, 스리랑카어 번역문과 함께 실어 발간했다. 지난해부터는 광주시가 주도하는 세계인권도시 포럼의 한 세션 참가자에서 벗어나 연구소가 자체적으로 여는 이주민 인권포럼을 시작했다. “관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의 경직된 틀을 벗어난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2019년부터 박 소장은 광주시의 인권단체 협력사업을 하면서 ‘시민과 함께하는 인권 서로 배우기’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두달에 한차례씩 강좌와 대화를 5년째 이어오고 있다. 한 해의 ‘배움’ 자료를 묶어 이듬해 단행본으로 낸 책이 벌써 네권 나왔다. 박 소장은 내년 포럼의 주제를 ‘이주민 직업 박람회’로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주민들에게 일자리의 선택지가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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