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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군대를 감옥으로 만든 이들의 책임 묻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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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 보아라. 어언 군이라는 F의 선봉을 달리는 반민족적인 집단에 들어온지도 7개월로 접어드는구나.” 김형보(60)씨는 자신도 잊고 있던 군 복무시절 편지 복사본의 첫 문장을 읽...

“OO 보아라. 어언 군이라는 F의 선봉을 달리는 반민족적인 집단에 들어온지도 7개월로 접어드는구나.”

김형보(60)씨는 자신도 잊고 있던 군 복무시절 편지 복사본의 첫 문장을 읽는다. 파쇼를 뜻하는 약어인 F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1982년 6월7일, 휴가 가는 병사를 통해 대학 동기와 선배에게 보내려던 편지였다. 첫 문장엔 사인펜으로 굵은 밑줄이 처져있었다. ‘국가보안법 7조’라는 메모와 함께.

밑줄과 메모는 오랏줄과 몽둥이로 변해 군 생활을 덮쳤다. 편지가 적발된 직후 김씨는 군 수사기관에 체포·감금되었고, 사정없는 폭행과 고문을 당했으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군 영창에 구속됐다. 그리고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추석 직전인 9월26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김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불법구금, 고문·가혹행위 인권침해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국가는 당시 제205보안부대(현 국군방첩사)가 신청인을 구속영장 없이 불법감금하고,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가혹행위를 가한 점에 대해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형보씨는 지난해 11월엔 대학생 강제징집 피해자의 한 명으로서 186명의 사건 신청인들과 함께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바 있다. 국가기록원 통계에 따르면 강제징집 녹화사업·선도공작(프락치 강요공작)피해자는 2921명에 이른다. 김씨는 “이제는 강제징집 피해자들이 각 부대에서 개별적으로 어떤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삶이 어떻게 변화됐는지에 관해서도 따져야 한다”며 이번 진실규명 결정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2019년 조직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김형보씨를 4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5층 회의실에서 만났다.

김형보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사건에 대해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신청하기 전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 국군방첩사령부(옛 보안사령부), 국방부, 병무청, 서대문경찰서, 서울경찰청 등에 정보기록공개 요청을 해 수사 관련 자료를 받아냈다. 군 수사관이 친 밑줄과 메모가 적힌 편지도 이 과정에서 확보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독재정권에 의해 어떻게 불법행위로 변질됐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들이었다.

연세대 1학년생이던 김씨는 1981년 11월25일 학내시위에 참가했다가 서대문경찰서 형사들에게 검거된 뒤 3일 만에 경기도 연천 5사단에 징집됐다. 그런데 기록을 보니 서대문경찰서 정보과에서는 ‘훈방대상’으로 결정해 경찰서장의 결재까지 얻은 것으로 나와 있었다. 누가 이 결정을 뒤집었을까. 군 입대 이후 편지가 적발되어 검거된 날짜는 6월10일인데, 보안사령부 문서에는 7월2일로 적혀 있었다. 불법구금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위한 보안사의 꼼수로 보였다. 본인에 대한 깨알같은 동향조사 기록도 한가득이었다. 친하게 어울렸던 동료 병사들이 자신의 행적과 동태를 보안부대에 세세히 보고한 내용이었다. 소름이 끼치면서 슬펐다.

보안사령부로 압송된 뒤 처음에는 서울 후암동 공작분실로 갔다. 그곳에서는 3일간 잠을 안 재우고 서치라이트처럼 강한 빛을 쏘이며 졸면 몽둥이로 때리면서 허위자백을 강요했다. “야간에 모포를 뒤집어쓰고 단파 라디오를 이용해 북한의 지령을 수신, 학원선동을 하자고 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음엔 서빙고 대공분실로 옮겨졌는데, 고문 강도가 더 세지면서 자백 요구 내용도 바뀌었다. “수색임무 수행 중 북한의 대남선전 전단을 습득‧탐독하여 북한 대남 선전활동에 공감했으며, 이에 불온 서신을 작성했다”라고 인정해야 했다. 김씨가 편지를 보내려 했던 한 여자 선배는 집에서 잠옷바람으로 체포돼 서빙고 분실로 끌려왔다. 김씨는 제5사단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1년, 집행유예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김씨는 언제 갑자기 엉뚱한 죄를 뒤집어쓸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피해의식에 휩싸여 평생을 보냈다고 했다. 해외에 나가서 현지 대학 동문이나 교포들이 호의를 보여도 믿지 않았다. 분명히 정보기관에서 보낸 프락치들이 있을 거라 의심했다. 그러면서도 먹고 살기 바빠, 또는 5·18 피해자나 삼청교육대 등 더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이들이 있는데 우리가 먼저 어떻게 나서냐며 권리회복 활동을 주저해왔다. “어차피 갈 군대인데 이렇게 때웠다 치자”고 여기는 피해자들도 있었다.

이제는 반격의 시간이다. 다음 순서는 재심과 피해보상 소송이다. 강제징집과 관련해서는 집단소송을 이미 진행 중이다. 지난해 진실규명을 받은 186명과 함께 7~8명씩 14개 조를 구성해 절차를 밟고 있다. 녹화사업·선도공작이 끝난 1987년을 불법행위가 끝난 해로 보고 이때부터 손해배상금의 지연이자를 계산해 소송가액을 정했다. 현재 확정된 첫 재판기일은 오는 25일과 27일이다. 또 다른 207명의 피해자들은 올해 진실화해위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기다린다.

김형보씨는 자신의 경우 운좋게 트라우마를 이겨낸 축에 속한다고 했다. 삶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이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고 했다. “10월에 열리는 국방부·행안부·교육부 국정감사를 주목해 주세요. 녹화사업·선도공작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이 나올 겁니다.” 김씨는 “국가가 현행 법령을 완전 무시하고 3개 부처와 병무청, 경찰청, 각 군이 합심 협력해 이렇게 무시무시한 불법행위를 일사불란하게 저지른 사례를 그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면서 “여기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그 어떤 정권도 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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