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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야 소통…윤 대통령 ‘야당 외면’ 이제 그만

Summary

윤석열 대통령이 10월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창설 제71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영수(領袖)는 집단의 우두머리라...

윤석열 대통령이 10월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창설 제71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영수(領袖)는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영수회담은 대통령과 제1야당 당수 두 사람이 만나서 하는 정치 회담을 의미합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기습적으로 영수회담을 제안한 것은 지난 9월29일이었습니다. 구속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된 지 이틀 만입니다.

“윤석열 대통령님께 민생 영수회담을 제안드립니다. 최소한 12월 정기국회 때까지 정쟁을 멈추고 민생 해결에 몰두합시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조건 없이 만나 민생과 국정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은 신속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민생의 핵심은 경제이고, 경제는 심리입니다. 대통령과 야당이 머리를 맞대는 것만으로도 회복의 신호가 될 것입니다. 국민께 일말의 희망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국민의 삶이 반걸음이라도 나아진다면, 이 모두가 국정을 전적으로 맡고 있는 대통령님과 정부 여당의 성과일 것입니다.”

회담 제안에 ‘대리 거절’

이 대표의 영수회담 제안에 대해 윤 대통령은 좀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기자들이 대통령실에 여러 차례 물었지만, 대통령실의 공식 입장은 “입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신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나흘 뒤 원내대책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민생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있고 국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재명 대표의 단식과 체포동의안 처리, 영장심사 등으로 국회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대통령께서 국익을 위한 외교 강행군을 이어갔고 추석 연휴 기간에도 민생 안보 행보를 이어갔다.”

“이재명 대표가 사과 한마디 없이 뜬금없이 민생 영수회담을 들고나온 것은 사실상 민생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통령과의 만남을 통해 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회복하려는 정략적 의도로 보인다는 것이 국민 다수의 시각이다. 이재명 대표가 정말로 민생에 몰두하고 싶다면 여야 지도부 간 대화 채널을 실효적으로 복원하는 것이 우선이다.”

윤 원내대표의 발언은 윤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하고 여권 내부의 조율을 거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두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이 대표는 범죄 피의자로서 국회를 마비시킨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대화하고 싶다면 윤 대통령이 아니라 김기현 대표를 만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수회담 거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언론의 태도입니다. 이 대표는 영수회담을 추석 당일에 제의했습니다. 추석 연휴 기간에 신문은 휴간했습니다. 10월4일치 신문에 영수회담에 대한 기사, 사설, 칼럼이 일제히 실렸습니다.

한겨레는 ‘윤 대통령, 이재명 대표 만나라’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경향신문 사설은 ‘정치·민생 힘 쏟자는 영수회담, 윤 대통령도 응답해야’였습니다. 영수회담을 수용하라는 주문입니다.

국민일보 사설은 ‘여야, 민생정치 복원 위해 말보다 행동에 나서야 할 때’, 서울신문은 ‘여야 4자회담 열고 민생해결 머리 맞대라’, 세계일보는 ‘이재명 공방 벗어나 민생정치 복원하라는 게 추석 민심’이었습니다. 여야 모두 양보해서 정치를 복원하라는 주문입니다.

동아일보·중앙일보·한국일보는 사설을 쓰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 사설이 특이했습니다. 제목이 ‘영수회담 요구 앞서 이 대표가 마비시킨 국회부터 정상화해야’였습니다.

“여태까지 국회를 마비시켜 온 사람은 이 대표 자신이다.”

“야당 대표가 여당 대표를 제쳐놓고 대통령만 만나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민생이 아닌 정치적 목적이 따로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대표가 구속영장이 기각되자마자 보란 듯 영수회담을 제안한 것은 ‘이제 사법리스크를 털었다’고 주장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영장 기각을 마치 무죄 판결처럼 포장하려는 의도다. 이 대표는 앞으로 추가 수사와 재판을 거쳐 유무죄가 가려질 것이다.”

상대 미워도 인정하는 게 정치

영수회담 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윤 원내대표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윤 대통령도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첫째, 정치의 첫번째 원칙은 아무리 미워도 상대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전당대회를 통해 정당하게 선출된 야당 대표를 투명인간이나 벌레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형사 피의자라는 이유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대통령은 정치인을 거의 만날 수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온갖 고소·고발 사건으로 입건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대통령은 정치인입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자신이 정치인이 아니라 통치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김기현 대표나 이재명 대표보다 한 차원 높은 초월적 존재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통치’하고 정치인들은 국회에서 정쟁을 일삼는다는 구도는 과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가 만든 반정치주의 프레임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은 여야 관계가 막히면 영수회담으로 돌파구를 마련했습니다. 심지어 독재자였던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도 영수회담을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중 박순천 민중당 대표, 유진산 신민당 총재,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이철승 신민당 총재와 모두 다섯 차례 영수회담을 했습니다. 유진산 총재와는 두 차례 만났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 와중에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영수회담을 했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이 자리에서 4·13 호헌 조치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두 차례 영수회담을 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기택 민주당 대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표와 영수회담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조순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여덟번 영수회담을 했습니다. 이회창 총재는 영수회담을 총재회담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당의 총재가 아니었지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와 회담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 정세균 통합민주당 대표,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회담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영수회담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청와대에서 3자 회동을 했습니다.

서울신문 10월4일치 3면
문재인 대통령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딱 한 차례 했습니다. 그 대신 여야 대표, 여야 원내대표들과 자주 만났습니다.

이처럼 대통령과 야당 당수가 일대일로 만나는 영수회담은 갈수록 줄고, 대통령이 여야 대표나 원내대표들과 한꺼번에 만나는 회의 방식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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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 맞아도 자주 만나야”

하지만 윤 대통령은 여야 대표들이나 원내대표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자리도 기피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특이한 경우입니다.

대통령과 야당의 만남은 형식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꾸 만나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입니다. 여야는 권력을 놓고 다투는 경쟁자인 동시에 국가를 함께 끌어가는 협력자이기 때문입니다.

영수회담에 대해서는 역대 대통령이나 야당 당수들 모두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김영삼 이회창 두 사람의 사례를 꼽고 싶습니다.

197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영수회담이 열렸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유신헌법 철폐, 대통령직선제 개헌,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 해결, 김대중 연금 해제 등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총재가 1974년 숨진 육영수 여사 얘기를 꺼내자 박정희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김 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은 공산당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조선 놈들은 문제가 있어요. 내가 정권을 내놓는다고 미리 알려지면 금방 이상한 놈들이 생겨날 겁니다.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비밀로 하자고 했고 김영삼 총재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 하겠다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았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뒷날 회고록에 “박정희의 눈물과 약속은 거짓이었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눈 것 자체는 진실이었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흉금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김대중 대통령과 일곱 차례 총재회담을 했습니다. 이회창 총재는 회담 뒤 매번 뒤통수를 맞았다며 칠회칠배(七會七背)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과 야당 총재의 만남과 대화는 자주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야가 싸울 때 싸우더라도 대통령과의 회합은 정국을 푸는 가장 확실한 해법이고, 서로 소통하면서 나랏일을 걱정하고 상의하는 모습 자체가 국민을 안심시킨다”는 이유였습니다. 저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회창 총재의 조언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윤 대통령은 노동·연금·교육 개혁을 약속했습니다. 3대 개혁은 국회 입법이 필요합니다. 야당이 협조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2024년 총선 전이든 후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윤 대통령이 야당과 만나지 않겠다는 것은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정치를 하지 않는 대통령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은 정치인이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하루속히 야당과 만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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