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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보다 정치적인 퍼스트레이디’ 로잘린 카터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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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미식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지미 카터, 로잘린 카터 부부. AP 연합뉴스 미국 역사상 프랭클린 루스벨트(재임기간 1933~1945) 대통령의 아내 엘리너 다음으로 정...

2018년 9월 미식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지미 카터, 로잘린 카터 부부. AP 연합뉴스

미국 역사상 프랭클린 루스벨트(재임기간 1933~1945) 대통령의 아내 엘리너 다음으로 정치에 적극적이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1977~81)의 아내 로잘린이 숨졌다. 향년 96.

카터센터는 로잘린이 19일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집에서 별세했다고 밝혔다. 올해 5월 치매 진단을 받은 로잘린은 별세 사흘 전부터 호스피스 돌봄을 받기 시작했다.

올해 7월 결혼 77주년을 맞은 카터 부부는 미국에서 가장 오랜 혼인 생활 기록을 보유한 전직 대통령 부부로 주목을 받아왔다. 99살로 최장수 전직 대통령 기록까지 지닌 카터 전 대통령도 올해 2월부터 치료를 중단하고 집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 왔으나, 뜻밖에 아내를 먼저 보냈다.

동화적이면서도 입지전적인 카터 전 대통령 부부의 사연은 미국인들 사이에 널리 회자돼왔다. 둘은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같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1927년 로잘린이 태어날 때 간호사인 카터 전 대통령 어머니가 산파 역할을 했다. 며칠 뒤 3살이던 카터 전 대통령은 신생아를 보여주겠다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요람에 누운 미래의 아내를 구경했다. 큰딸인 로잘린은 1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바느질과 식료품점 파트타임 일을 하는 어머니를 도우며 학업을 이어갔다.

1945년 해군사관학교 졸업반 때 고향에 들른 카터 전 대통령은 로잘린과 단 하루 데이트를 한 뒤 어머니에게 결혼 상대를 만났다고 얘기했다. 둘은 이듬해 결혼했고, 로잘린은 그토록 떠나고 싶던 조지아주 농촌을 벗어났다.

지미 카터와 로잘린 카터 부부가 1946년 결혼식 날 찍은 사진. EPA 연합뉴스

로잘린의 탈농촌 꿈은 7년 만에 끝났다. 땅콩 농장을 경영하던 시아버지가 갑자기 별세하자 남편이 촉망 받는 잠수함 지휘관을 그만두고 가업을 잇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카터 전 대통령은 정치에 꿈을 두기 시작해 주 상원의원을 거쳐 주지사, 마침내 대통령에까지 오른다. 로잘린은 선거전에서 전국을 돌며 남편을 위해 유세를 했다.

1977년 백악관에 들어간 로잘린은 전통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벗어던졌다. 백악관 이스트윙에 영부인실을 설치하고 비서실장도 따로 뒀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각료회의에도 참석했다. 주지사 아내일 때부터 신경 쓴 정신건강 분야에 집중해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는 이를 ‘미친 사람’ 취급하던 정책과 문화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대통령 특사로 중남미 7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협정인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대해서도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터 전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반자이자 유력한 조언자였던 셈이다. 남부 출신의 부드러운 말씨와 함께 정치적 집념을 지닌 로잘린에게는 ‘철목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지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던 로잘린은 남편이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선거일 밤 한 백악관 참모가 카터 전 대통령에게 분해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하자, 로잘린은 “난 우리 두 사람의 분함을 합친 것 이상으로 분하다”고 말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백악관을 나온 로잘린은 귀향해 남편과 함께 카터센터를 만든 뒤 40년 넘게 국제적 인권 옹호 활동을 펼쳤다.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에서 로잘린에 대해 “지미 카터가 조지아주 시골에서 백악관으로 나아가도록 도운 진정한 파트너”라고 평가했다. 그는 생전 “난 늘 지미보다 정치적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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