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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한반도에 이스라엘이 건국됐다면

Summary

2000년 10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카르니 국경검문소에서 팔레스타인의 13살 소년이 이스라엘 탱크에 맞서 돌을 던지고 있다. 한달 뒤 이스라엘군의 총에 맞아 숨진 이 소년의 아...

2000년 10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카르니 국경검문소에서 팔레스타인의 13살 소년이 이스라엘 탱크에 맞서 돌을 던지고 있다. 한달 뒤 이스라엘군의 총에 맞아 숨진 이 소년의 아버지는 “우리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몰 순 없지만, 알라의 뜻이라면 내가 이를 바꿀 순 없다”고 말했다. 가자/AP 연합뉴스

올해 10월7일 이후 전세계의 이목은 ‘팔레스타인’에 쏠려 있다. 현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 역사에 ‘만약에’란 없지만, 그래도 한번 가상의 역사를 떠올려보자.

‘만약인’과 한민족

지금으로부터 1888년 전인 서기 135년, 한반도에 있던 ‘만약 왕국’이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졌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박해를 피해 세계 전역으로 흩어졌다. 이들을 ‘만약인들’이라고 해두자. 만약인들은 자신들만의 경전과 독특한 유일신교 사상을 갖고 있었고, 자신들이 다른 민족공동체와 대별된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여겼다. 문화·종교적 차이와 탁월한 돈벌이 역량은 때때로 그들에게 성공과 시련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자본주의 태동기인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서방 주류 질서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각국에선 이제 막 고개를 내민 배타적 종족주의와 더불어 ‘만약인’ 공동체를 향한 반감이 불붙듯 커졌는데, 불행히도 이는 20세기 최악의 인종청소로 이어졌다.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과 중동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를 거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영토를 잃었고 거주 지역도 크게 축소됐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만약인들은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우간다의 미거주지, 중국·러시아의 접경 등 여러 지역이 물망에 올랐지만, 만약인 경전에도 ‘약속의 땅’이라고 적힌 한반도만큼 매력적인 곳은 없었다. 국제 정세를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강대국 엘리트들과 협상하는 방법을 알았던 만약인들은 한반도를 식민 통치했던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세워도 된다는 승인을 받았고, 한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선조들이 그 땅을 떠난 지 1800여년 만에 ‘약속의 땅’으로 귀환한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수천년 동안 중국 대륙과 인근의 섬으로부터 이주해온 이들의 후손인 그들은 스스로를 ‘한민족’이라고 호명하며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1948년 기준 인구의 94%가 ‘한인들’로 이뤄진 이 땅에서 6%도 되지 않는 ‘만약인들’이 갑자기 자신들의 나라를 세운다는 건 누구도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다. 전세계적인 ‘만약인 네트워크’와 자본이 있었고, 일본과 미국의 지원도 힘이 됐다. 유엔은 한반도의 56%에 달하는 땅을 6%에 불과한 만약인들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식민 통치의 종식으로 해방이 올 것이라 믿었던 ‘한인들’은 갑작스러운 통보에 분노했다. 만약인들은 “나가라”고 위협하며 총칼로 대재앙을 일으켰다. 한인 원주민을 향한 인종청소로 수천명이 학살됐고 530개의 읍·면이 파괴됐다. 당시 인구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인구가 자신이 살던 땅에서 강제 추방됐다. 이는 한인들에게 뼛속까지 깊은 상처로 남았다. 지금도 한인 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을 안고 산다. 반면 오늘을 사는 만약인 청년들은 1948년의 재앙을 알지 못한다. 교과서에선 이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관련 자료 역시 제거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약인들은 유엔 분할선마저 무시하고 한인들의 땅을 점령했고, 1968년 전쟁 뒤엔 아예 정착민들의 이주를 방임하고 부추겼다. 이들 정착민은 매우 적극적이고 교조적인 선민사상을 갖고 있어서, 어떤 이들은 민병대 수준의 무력을 보유하기도 했다. 그들은 한인들이 살고 있는 영남과 호남에 느닷없이 크고 작은 정착촌을 건설하고, 군대를 동원해 점령지를 넓혀나갔다. 이는 무력으로 점령한 땅에 점령국 민간인이 정착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었지만, 만약인 우월주의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했다. 그들은 서울의 반을 갈라 차지했고, 만약인 정착촌을 지키는 거대한 장벽을 세웠다. 한인 아이들은 빼앗긴 들에서 파티를 벌이는 정착민들을 증오했고, 돌멩이를 던지며 만약인 군대에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수천명의 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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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무엇을 멈춰야 하는가

평화적 식민지 해방운동을 펼쳐온 한인들의 분노는 짙어졌다. 한인 내의 여러 정치적 목소리 중 ‘무장저항론’이 힘을 얻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한인들을 대표하던 정당은 무능했고, 식민 지배자들에게 협조적이었다. 한인들은 더 이상 바보처럼 당하기만 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2006년 총선에서 강경파가 압승을 거둔 것엔 이런 이유가 있다.

선거 결과가 자신들의 예상을 벗어나자 만약인들과 미국·일본 등 강대국들은 한인 봉쇄를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만약인들은 한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구의 경계를 두르는 높이 8m의 장벽을 세웠다. 그곳에 갇힌 한인 수백만명은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바다마저 봉쇄됐다. 식수와 전기, 식량 등 모든 것은 만약인 점령당국이 할당한 만큼 배분됐고, 외국으로 나가려고 해도 서울을 통과해서 움직여야 했다. 한인들은 끔찍한 차별과 멸시, 인종분리 정책에 고통받았기 때문에 일상 자체가 재앙이었다. 이런 인종청소에 비판이 일자, 만약인들은 “반만약주의”라며 비난했다. ‘약속의 땅’ 한반도에 만약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한인은 바퀴벌레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인 독립운동세력 중 한 무장정파가 장벽을 부수고 만약인들을 공격했다. 그것은 유례 없는 반격이어서 만약인들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인들은 만약인 정착촌에 살던 200여명의 민간인까지 납치해 인질로 삼았는데, 이는 감옥에 갇힌 한인 정치범 6천명과 맞교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반격은 인종청소와 점령을 영구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만약인 극우주의자에게 타격을 입혔다. 분노한 만약인들은 ○○지구를 향해 무지막지한 폭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곳 인구의 40%는 어린이였기에 그만큼 많은 아이들이 살해됐다. 그리고 폭격이 시작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만약에’로 시작한 이 가정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서구 언론의 보도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사안을 ‘종교 분쟁’ 등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러나 대다수 팔레스타인 민중은 세속주의적이며 다른 종교를 존중한다. 이 비극은 10월7일에 시작되지 않았다. 1948년 시오니스트들이 일방적으로 건국을 선포하고 원주민들을 추방했을 때, 1968년 노골적인 인종분리를 시작했을 때 이미 시작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다.

우리의 앞세대가 겪은 식민주의 역사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시선에서 사태를 보도록 안내한다. 한데 우리는 왜 제국의 시선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보게 된 걸까? 동아시아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우선은 장벽을 세워 가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학살을 멈추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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