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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치 지방정부 교부금 삭감…세수결손 떠넘기기

Summary

빨간 약을 먹는 순간이 있다. 그동안 알고 있던 세상 너머 실제 세상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는 의미다. 예전 한 지방자치단체 인수위원회에 참여했을 때, 빨간 약을 먹었던 경험이 있...

빨간 약을 먹는 순간이 있다. 그동안 알고 있던 세상 너머 실제 세상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는 의미다. 예전 한 지방자치단체 인수위원회에 참여했을 때, 빨간 약을 먹었던 경험이 있다. 인수위에서 나는 예산 편성 및 지출의 문제점을 당선자에게 보고하는 업무를 주로 했다. 인수위 회의에서 당선자가 내게 물었다.

“저는 좌파 시민단체에 가는 예산을 줄이고 싶어요. 내년 예산 편성이야 안 하면 되겠지만… 당장 올해 지출부터 삭감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선거에서 당선된 첫해는 직전 단체장이 편성한 예산을 집행하게 된다. 전 단체장이 편성한 예산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사업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미 의회에서 심의·확정된 예산을 집행부가 마음대로 줄이거나 늘리면 안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정 줄이고 싶으면, 감액 추경을 편성해서 의회 승인을 얻으면 됩니다.” 내 말을 듣더니 인수위원장이 나를 보고 비웃는 것이 느껴졌다. ‘흠… 예산 전문가라고 하더니 딱 거기까지군’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광역지자체 기조실장 출신이었다. 지자체 공무원 중 최고 자리까지 올라갔던 ‘선수’인 만큼 내부 일 처리 방법을 샅샅이 아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선인님, 굳이 추경까지 편성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자금 배정만 안 하면 됩니다.”

“이미 예산 확정? 돈 안 주면 돼”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믿고 있는 세상이 단순한 매트릭스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은 예산 편성 금액을 증액하거나 삭감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도 본인이 생각하는 중요 사업을 예산에 반영하고자 정치적 활동을 한다. 장애인 단체는 장애인 예산 증액을 위해, 연구자들은 연구개발(R&D) 예산 증액을 위해 투쟁하고 여론 작업을 한다.

그러나 전직 광역단체 기조실장 출신 인수위원장은 추경이라는 공식 루트를 통해 예산 편성 금액을 추가로 경정(고쳐서 바로잡음)하자는 나의 주장을 비웃었다. 민주적 절차 없이 그냥 예산 부서가 사업 부서에 자금을 배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업 집행을 막는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예산 부서가 자금 배정 권한으로 예산 편성의 모든 노력을 수포로 되돌릴 수 있는 실무적인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됐다.

똑같은 일이 현재 중앙정부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밝힌 올해 세수결손 규모는 59조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추가 국채 발행은 없다고 못 박는다. 한덕수 총리는 “정부가 허리띠 졸라매고 견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야가 이미 승인한 지출 규모를 행정부가 마음대로 줄일 수는 없다. 그래서 추경호 경제부총리도 한 총리 말을 부정한다. 강제로 불용을 종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불용을 활용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회식 자리에서 “나는 짜장, 알아서 비싼 거 시켜”라는 부장님의 말과 동일하다. 예산을 총괄하는 기재부 장관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불용을 활용하겠다고 하면, 알아서 불용을 발생시켜야 한다는 시그널을 줄 수밖에 없다.

지방정부 및 교육청에 지급하는 지방교부세 등은 내국세 수입에 자동으로 연동된다. 즉, 내국세의 약 40%가 지방정부 및 교육청에 교부된다. 그런데 기재부는 올해 발생한 세수결손만큼 지방정부에 돈을 덜 주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한다. 올해 당장 덜 주겠다는 교부금이 23조원(내국세 세수결손의 40% 규모)이다.

그러나 이는 국회의 예산심의권을 무시하는 행위다. 기재부는 올해 내국세 규모를 예측한 세입예산안을 작년에 이미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는 여야 합의를 통해 지방정부에 주는 예산안 심의를 지난해에 이미 마쳤다. 지방정부는 중앙정부가 주기로 약속한 금액만큼 지출계획을 잡고 10월 초 현재까지 집행했다. 물론 정부의 내국세 예측 금액과 실제 결산 금액이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내년(2024년) 결산 때, 지자체 교부금을 정산하는 게 맞다. 예상보다 내국세가 더 들어왔으면 추가로 지급하고 내국세가 덜 들어왔으면 감액 지출을 한다. 감액 지출의 시기는 차차년(2025년)까지 줘야 할 교부세를 차감하는 형태가 된다. 즉, 이미 집행한 교부세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 내년 결산 정산에 따라 2025년에 줘야 할 교부세를 덜 교부하는 방식으로 정산하는 것이 법과 원칙과 관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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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탈법에 조용한 야당

이미 세수결손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기재부가 세수결손을 빨리 인식하고 싶으면 국회에 ‘세입 감액추경안’을 제출해야 한다. 세수결손에 따라 올해 세입 감액추경에 따른 교부세 감액 반영 시기도 2025년도까지 가능하다. 2014년 지방교부세법 개정으로 내국세 결손분은 2년 뒤에 반영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지방정부의 예측 가능한 행정, 재정 평탄화(fiscal smoothing)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기재부는 국회에 ‘세입 감액추경안’을 제출하지 않고, 지방교부세를 올해 당장 깎는다고 한다. 기재부가 행정안전부를 통해 지방정부에 보내야 할 지방교부세 자금 배정액을 깎는 방식이다. “그냥 자금 배정만 안 하면 된다”는 어느 지방정부 인수위원장의 인식과 똑같다.

정리해보자. 지방교부세는 내국세에 연동되므로 내국세 예측 차이만큼 정산해야 하는 건 맞는다. 지방재정법은 물론 재정원칙과 관행에 따라 올해 내국세 결손은 2025년도 교부세를 덜 주는 방식으로 정산해야 한다. 지자체는 이미 사업을 진행하고 마무리만 남은 상황이다. 갑자기 올해 교부세를 깎으면 마무리할 수가 없다. 정산 시기는 올해가 아니라 내후년(2025년)이어야 한다. 굳이 지방정부에 세수결손을 떠넘기면서 법과 원칙, 관행을 무시하는 이유는 초과세수를 위한 국채 발행은 없다는 대통령의 의지 말고는 해석할 수 없다.

필자가 몸담았던 지방정부 인수위 회의에서 의회의 예산심의권을 무시하자는 인수위원장 발언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던 인수위원들의 반응은 더 놀라웠다. 교부금 배정을 삭감하겠다는 현 정부의 방침에 야당 국회의원과 단체장도 아무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국회에 세입 감액추경안을 제출하라고 하거나 최소한 올해 교부세 금액을 삭감하지 말고 2025년 교부세 금액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지 않는 야당은 패배주의에 빠진 걸까.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예산서, 결산서 집행 내역을 매일 업데이트하고 분석하는 타이핑 노동자. ‘경제 뉴스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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