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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장인 한땀한땀 ‘나전칠기’…이거 하나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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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유리 진열장에 전시된 ‘나전 국화넝쿨무늬 상자’. 너비 33㎝, 높이 19.4㎝ 크기다. 신지은 제공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세밀가귀의 방’(2024년 1월7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유리 진열장에 전시된 ‘나전 국화넝쿨무늬 상자’. 너비 33㎝, 높이 19.4㎝ 크기다. 신지은 제공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세밀가귀의 방’(2024년 1월7일까지)은 단 한점의 문화재를 위한 전시다. 바로 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나전칠기 ‘나전 국화넝쿨무늬 상자’다. 이 상자는 지난여름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에서 되찾아 온 환수문화재로, 일반 관람객에게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작은 전시는 말 그대로 ‘하나만 보아도 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요즈음 영상 콘텐츠를 장악한 쇼트폼에 견주어볼 법하다. ‘나전 국화넝쿨무늬 상자’에 대한 짧은 설명은 곧 전시 전체의 설명이기도 하다. 한자어가 들어간 묵직한 제목에 조금 긴장한 채 전시실에 들어선 관람객들은 안쪽 깊숙이 놓인 상자 하나를 저마다의 속도로 즐긴 뒤 가벼운 걸음으로 떠난다.

혹시 문화재는 뭔가를 많이 알고 봐야 ‘본전’일 것 같고, 그러지 않으면 기껏 보아도 왠지 손해일 것 같다는 생각에 박물관 걸음을 망설이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이 전시로 마음의 문턱을 넘기 좋을 것이다. 문화재 한점을 잠시 만나고 돌아서는 짧은 시간이지만, 좀처럼 전시에서 보기 어려운 고려 나전칠기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귀한 대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5㎜ 자개에 새긴 꽃잎

상자의 뚜껑을 열어놓은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전시에서는 이 상자를 고려 나전칠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소개한다. 이 상자는 헝겊으로 감싼 나무틀에 옻칠을 하고 자개를 장식하는 기법인 ‘목심저피법’으로 만들어졌다. 고려 시대에는 대부분 이렇게 물건의 바탕을 만들었다. 여기에 전복·소라·조개 등의 껍데기를 얇게 갈아낸 자개와 금속 등을 붙이고 옻칠을 올려 완성한 것이 나전칠기다. 이렇게 나무와 옻칠, 자개, 금속 등 물성이 다른 여러 재료를 사용해 제작하는 과정에는 뛰어난 기술이 필요했다.

상자는 윗면과 옆면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유리 진열장에 전시돼 있다. 각 면을 조밀하게 채운 장식의 정교하고 탁월한 꾸밈새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구슬 무늬 1700여개, 모란과 국화 넝쿨무늬 800개를 표현하기 위해 4만5천장에 달하는 자개 조각을 하나하나 붙여 넣었다. 특히 가느다란 금속선을 심어 만든 넝쿨 사이로 피어난 국화 꽃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유물의 진가가 보인다. 한장의 크기가 2.5㎜에 불과한 자개에 음각선을 그어 꽃잎의 결을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2.5㎜ 크기 자개 꽃잎 한장에도 줄무늬를 새겨 넣었다. 신지은 제공

이렇게 작은 꽃무늬를 촘촘하게 넣고, 아주 작게 오려낸 자개에도 세부 묘사를 더하는 섬세함은 고려 나전의 특징이기도 하다. 너비 33㎝, 높이 19.4㎝인 작은 상자 안에 얼마나 많은 공이 들어가 있는지. 눈길이 자꾸만 파고들수록 이 나전칠기 상자의 아름다움은 성큼성큼 우리 마음속으로 다가온다.

공예품을 감상하는 일은 만든 이들의 시간을 헤아리는 일로 이어진다. 전시실 입구 쪽에 설치된 모니터는 3D(입체) 스캔과 엑스(X)선으로 유물을 촬영한 자료 영상을 보여준다. 화면을 터치하며 맨눈으로 다 훑지 못했던 디테일을 확대해 보던 손끝이 문득 멈칫하는 순간이 있다. 수백년 전에 만들어진 나전이 여전히 온 힘을 다해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는 모습이 화면에 가득 차는 순간이다.

4만5천개. 그 많은 조각을 갈고 오리고 붙인 모든 과정에 사람의 손길이 담겨 있다는 것은 새삼 경이롭게 느껴진다. 이 나전칠기 안에 자신의 이름 대신 자연의 빛을 남긴 이들의 시간을 되짚어보면, 올 한해 우리가 보낸 시간 속에도 눈대중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으리라 기대하게 된다. 손톱보다 작은 꽃 한송이에도 꽃잎마다 결을 새기는 마음이 우리의 어느 계절에도 깃들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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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나전칠기 20점 남짓

상자 표면을 확대한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 상자는 100년 넘게 일본 개인 소장가의 창고에 보관되어, 최근까지 학계는 물론 일본에서조차 알려지지 않은 유물이었다. 그랬던 것이 지난해 여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협력하는 현지 네트워크를 통해 존재가 확인된 뒤 올해 여름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매입 전에 먼저 국내 연구자들이 재료와 기법을 정밀 조사해 고려 유물임을 확인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환수가 완료되기까지의 치열한 준비 과정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따름이다.

전시 제목인 ‘세밀가귀의 방’은 12세기에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의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고려의 문물과 풍속을 기록하고 평가했는데, 나전칠기에 대한 항목에 “나전지공 세밀가귀”(나전 솜씨가 세밀하여 귀하게 여길 만하다)라는 찬탄을 남겼다. 나전칠기는 11세기부터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예물에 포함될 만큼, 고려를 대표하는 공예품 중 하나였다.

그러나 1천여년 동안 그 명성이 이어져왔음에도, 오늘날까지 전하는 고려 나전칠기는 20점 남짓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세계에 남아 있는 유물을 다 합친 수이며, 그나마도 대다수는 외국에 있다. 그래서 이번에 만듦새와 보존 상태가 모두 뛰어난 나전 국화넝쿨무늬 상자가 한국으로 돌아와 우리 앞에 모습을 선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뜻깊은 일이다.

박물관에서 만나는 전시들은 주제나 규모만큼 기간도 다양하다. 전시 기간이 넉넉하다고 보러 가길 미루다 놓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차 하면 지나갈 듯한 조바심에 미리 날짜를 챙겨 보는 것도 있다. 한달 남짓한 이 전시가 어떤 이에겐 올해의 마지막, 어떤 이에겐 새해의 첫 전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명동에서, 광화문에서, 건물 안팎을 화려한 빛과 영상으로 채운 서울의 겨울 풍경 사이에서, 작은 상자 하나에 응축된 4만5천개의 빛을 바라보는 시간은 특별한 느낌을 준다. 겨울 고궁을 걸으며 한해를 돌아보는 어느 날, 잠시 박물관에 들러 이 작은 전시실에 머무는 것은 어떨까.

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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