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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누구? 우리 모두 악의 없이 조금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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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NEW 제공 ※ 이 글에선 영화의 주요 줄거리를 다루고 있어 관람 경험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쓴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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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선 영화의 주요 줄거리를 다루고 있어 관람 경험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쓴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말 중에 “풍요”라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이 단어만큼 고레에다의 영화를 잘 묘사하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레에다는 모두가 비극을 보는 자리에서 따뜻함이랄까, 희망이랄까, 여하튼 다른 어떤 것을 보는 감독입니다. 기어코 그런 면을 찾아내고 말지요. 예컨대 ‘아무도 모른다’(2004)가 세상에 던진 충격에는 확실히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지옥에서 건져낸 희망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도쿄에서 벌어진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아버지들은 일찌감치 도망갔고, 어머니는 혼자 아버지가 다른 다섯 아이를 키우다가 한 아이가 죽고, 네 아이를 둔 채 집을 나가버리죠. 열네살짜리 첫째가 아이들을 돌보던 중 막내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일본 사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비정한 어머니를 향한 비난과 옆집 사정이라곤 관심도 없는 이웃에 대한 한탄, 관계 단절 사회가 된 일본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흘러넘쳤죠.

그런데 고레에다는 다른 부분이 궁금했습니다. 어째서 열네살 소년은 동생들을 버리고 집을 떠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책에서 이렇게 씁니다. “방치된 6개월 동안 그들이 본 풍경은 잿빛 ‘지옥’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들 생활에는 물질적 풍요와는 다른 어떤 ‘풍요로움’이 존재했을 테고, 남매들 사이의 감정 공유가, 기쁨과 슬픔이,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성장과 희망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아파트 밖에서 ‘지옥’을 얘기할 게 아니라, 전기가 끊어진 아파트 안에서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험했을 ‘풍요로움’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상실되었는지를 상상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요.”

‘아무도 모른다’는 어두운 영화입니다. 고레에다는 사회가 이미 사라진 자리에서 아이들이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한 아이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영화에 그대로 담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아이들의 일상에서 상실·두려움·고통뿐 아니라 재미·즐거움·든든함 등 여러 감정을 건져내 관객의 마음에 내려놓습니다. 그러므로 관객은 ‘끔찍함’ 외에 자신이 느끼게 되는 다채로운 감정에 당황하고 맙니다. 가슴을 채운 먹먹함을 발산할 대상과 방법을 잃은 채로 복잡성이라는 화두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죠.

나는 이 상태를 설명할 단어를 ‘괴물’(2023)의 각본가인 사카모토 유지의 인터뷰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괴물’을 보면서 관객들이 “누가 괴물인가?”를 밝히려고 애쓰다가 결국 영화에 뒤통수를 맞는 상황에 대해 “자발적으로 빠진 함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고의 습관적인 경로, 그리고 영화 관람의 습관적인 경로 안에서 ‘함정’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고레에다의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 함정 안에 머물며 오래도록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함정에서 빠져나올 때쯤엔 세상을 조금은 다르게 봐주기를 기대하죠.

이야기가 갑자기 ‘괴물’로 점프해버렸습니다만, ‘풍요’와 ‘함정’이라는 키워드 안에서 ‘괴물’과 ‘아무도 모른다’는 서로 꽤 닮았습니다. 물론 전자는 사카모토가, 후자는 고레에다가 각본을 썼어요. 그래도 ‘세 인물의 관점에서 각기 다르게 진행되는 3부 구성’이라는 플롯의 화려함을 제외한다면 ‘괴물’은 고레에다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전혀 이질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에도 고레에다는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다른 내일을 길어 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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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성 폭력’에서 해방시키는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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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초등학교 5학년 아들 미나토를 혼자 키우는 사오리의 관점에서 시작합니다. 어느 날부턴가 미나토의 행동이 이상해지고, 사오리는 “무슨 일이냐?”고 추궁을 하게 되죠. 그러자 미나토는 담임인 호리에게 폭언과 체벌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사오리는 학교를 찾아가 항의를 하지만, 학교에선 형식적인 사과의 말만 반복할 뿐입니다. 결국 사오리는 호리의 해고를 요구하고, 이에 호리는 미나토가 같은 반인 요리를 때리고 괴롭힌다고 폭로합니다.

이제 영화는 호리의 시점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시간이 호리의 관점에서 반복되면서 ‘다른 진실’이 드러나죠. 사오리가 보기엔 폭력 교사 호리와 그를 비호하는 학교가 괴물이겠으나, 호리 처지에선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사오리와 문제를 서둘러 묻어버리려는 학교 시스템이 괴물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미나토가, 괴물이죠.

그렇다면 미나토의 관점에서는 어떨까요? 미나토가 보기에도 자신이 괴물입니다. 남자아이인 요리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운데,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가 없어 결국 거짓말을 하고 호리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렸으니까요. 그리고 영화는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세 가지 인식의 지평을 엮으면서 누구든지 괴물이 될 때가 있다고 등을 토닥입니다.

우리 모두는 선명하게 의도된 악의 없이 누군가를 해치곤 하는, 조금씩 괴물의 면모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 괴물성에 근원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건 역시 우리가 사회의 관습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학습하고 내면화한 편견이죠. ‘괴물’에선 다양한 편견들이 무대 위로 올려지지만, 특히 주목되는 건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입니다. 요리의 아버지가 동성애자 아들을 학대한 것으로부터 사건이 촉발된 셈이니까요.

‘괴물’과 닮은 또 한편의 영화는 ‘공기인형’(2010)입니다. 두편 다 고레에다의 필모에선 흔치 않은 연애담이니까요. 여기선 인간과 사랑에 빠진 인형 노조미의 시간이 펼쳐집니다. 노조미는 세계가 그어놓은 경계를 선선히 넘는다는 점에서 어쩐지 요리와도 닮았습니다. 요리가 선보이는 기이할 정도의 천진함도 노조미를 떠오르게 하죠.

학부모가 괴물이 되고, 학교와 교사가 괴물이 되며, 학생이 괴물이 되는 세계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풍요로움을 보려는 태도와 함께 우리가 퀴어한 사랑과 대면하게 된다는 게, 일종의 계시처럼 다가옵니다. 강요되는 편견과 정상성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에너지와 이야기가 필요한 시기이지 않은가 싶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그 안에 결여를 품고/ 그것을 타자로부터 채운다.” ‘공기인형’에 등장하는 시의 한 구절을,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께 드립니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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