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옥이
오승민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8000원
“언니는 어디 있을까. 백구는 어디 있을까. 재미있는 놀이를 하나? 나만 빼놓고.”
흙 위에 노란 꽃을 얹은 ‘꽃밥’을 나눠 먹던 언니가 사라졌다. 꽃밥을 지키려 새를 보고 캉캉대던 백구도 자취를 감췄다. 점옥이는 1948년 10월19일 혼자가 된다. ‘검고 큰 새’(비행기)가 날아오고, 군인들이 찾아와 총으로 마을 주민들을 위협한 뒤부터 오동나무 아래 소꿉 살림을 혼자 지킨다.
이날은 ‘여순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제주4·3 진압 출동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는 병력을 동원해 이들을 유혈 진압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사건’ ‘반란’ ‘항쟁’ 등의 다양한 이름이 붙지만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됐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책은 작은 헝겊 인형 점옥이의 눈으로 우리 현대사의 수많은 상처 중 하나인 이날을 그린다. 저자가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겪었던 일들을 그림과 글로 풀어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을 모르는 점옥이의 시선으로 사건을 따라가다 보니 슬픔과 안타까움의 정서가 책 전반을 흐른다. 푸른빛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풍경은 가슴을 시리게 하며 민간인 학살이라는 사건의 비극성을 자연스레 전한다. 정부가 당시 피해자들을 희생자와 유족으로 공식 인정한 게 사건 발생 74년 만인 지난해 10월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책 속 풍경이 더욱 가슴 시리게 다가올 것이다.
책은 군인들이 언니와 점옥이가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공간을 파괴한 것처럼 전쟁이나 국가폭력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어린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희생자의 절대다수 역시 어린이다. 점옥이처럼 언니를 잃고 폐허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인형들의 모습을 최근 전쟁에서도 볼 수 있다.
백구도, 언니도 이젠 없지만 이들 옆에 서 있던 오동나무는 쑥쑥 자랐다. 속에는 상처를 품고 있지만 마을에도 평온은 찾아왔다. 책 마지막 장, 보랏빛 꽃을 피운 오동나무 위로 날아오는 하얀 비둘기는 더는 어린이를 희생시키는 비극은 없어야 한다는 저자의 바람으로 읽힌다.
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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