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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마을’ ‘안개’ 김수용 감독 별세…문예영화 황금기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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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수용 감독. 연합뉴스 ‘갯마을’(1965) ‘안개’(1967) 등 수준 높은 문예영화를 연출하며 1960~70년대 한국영화계를 이끈 김수용 감독이 3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 김수용 감독. 연합뉴스

‘갯마을’(1965) ‘안개’(1967) 등 수준 높은 문예영화를 연출하며 1960~70년대 한국영화계를 이끈 김수용 감독이 3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

192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안성공립농업학교에 다니던 시절 습작소설을 쓰거나 자작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등 문화예술에 재능을 보이며 성장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서울사범학교에 다니며 연극부 부장을 하는 등 연극 연출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인 1951년 정훈 장교로 영화과에 배속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양주남 감독의 조감독으로 ‘배뱅이굿’(1957) 제작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영화 창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이듬해인 1958년 ‘공처가’로 감독 데뷔했다. 당시 군인 신분이었던 고인이 쉬는 주말을 활용해 찍은 이 영화는 딸의 혼사를 앞두고 가정불화를 겪는 곰탕집 주인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내용의 코미디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이 작품에 이어 ‘3인의 신부’ ‘구혼결사대’(1959)를 잇따라 흥행시켰으며 전역한 이후에도 ‘벼락부자’(1961) ‘청춘교실’(1963) ‘내 아내가 최고야’(1963) 등 코미디 영화를 성공시키며 충무로의 인기 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 ‘갯마을’. 씨네21 자료사진

이후 김 감독은 국외 영화를 표절하거나 뻔한 신파극을 반복하는 한국 영화의 경향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김소월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애상’(1959), 모파상의 단편을 한국적으로 번안한 ‘돌아온 사나이’(1960)를 발표하면서 문학적 서사에 집중하며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해나갔다. 해방 이후 판자촌에 모여 사는 실향민들의 애환과 갈등을 그린 ‘혈맥’(1963)은 가난한 실향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는 빈곤에 허덕이는 아이들의 현실을 담아 1960년대 최고의 흥행작이 됐으며 제26회 베니스영화제에도 출품됐다.

소설가 오영수의 원작을 각색한 ‘갯마을’(1965)은 문예영화의 황금기를 열어젖힌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제작사들이 정부로부터 외화 수입 쿼터를 받기 위해 만들었던 문예영화는 초기에는 문학작품을 스크린에 옮기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김 감독의 ‘갯마을’ ‘산불’(1967) 등을 거치며 원작에 대한 창의적 해석이 담기면서 뛰어난 영화적 성취를 보여줬다. ‘유정’(1966)은 국도극장에서만 33만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김 감독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현대인의 심리를 탁월하게 그려낸 ‘안개’(1967)로 제14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1970~80년대에도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8) ‘만추’(1981) ‘허튼 소리’(1986) 등을 연출했으며, 고인은 마지막 연출작 ‘침향’(1999)까지 121편의 영화를 필모그래피에 올렸다.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 씨네21 자료사진

1981년부터 1993년까지 청주대 영화학교 교수로 재임하면서 후학을 길러냈고 영화감독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에 오르기도 했다.

장례식은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정지영 감독과 이장호 감독, 배우 안성기, 장미희 등이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한국의 주요 감독과 배우들 70여명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한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5일 오후 1시로, 장례위원회 주최로 영결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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