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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이 축소한 역사…참군인 vs 정치군인

Summary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12·12 때 사람이 죽은 줄 몰랐어.” 영화를 함께 본 동행인이 말했다. 우리는 12·12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이름값만큼 제...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12·12 때 사람이 죽은 줄 몰랐어.” 영화를 함께 본 동행인이 말했다. 우리는 12·12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이름값만큼 제대로 알려진 역사는 아니다. ‘서울의 봄’은 그런 의미에서 필요했던 영화다. 역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말이다.

극영화는 ‘팩트’일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역사에 대한 논의의 장을 펼쳐놓았다면, 작품은 이미 하나의 역할을 한 셈이다. 나는 이제 ‘서울의 봄’이 해낸 역할에 기대어 작품이 충분히 다루지 못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애초에 블랙코미디를 꿈꾸었으나 일종의 ‘반공영화’가 되어버린 문제작 앞에서, 우리는 또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비열한 군사조직 공들여 폭로

하나회 리더 전두광, 그를 견제하려는 계엄사령관 정상호, 끝까지 쿠데타에 저항하는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하나회. 영화는 하나회가 어떤 조직이었는지 공들여 묘사하면서 사익에 충성하는 머리 좋고 비열한 군인들의 사조직이었던 그 얼굴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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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26일. 독재자가 사망한 후 한국 사회에는 민주화를 꿈꾸는 희망의 기운이 흘렀다. 언론은 이런 분위기를 ‘프라하의 봄’에 빗대 ‘서울의 봄’이라 불렀다. 하지만 1980년 5월 광주를 지나면서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서울의 봄을 완전히 제압한다. 하지만 이 문장이 모든 걸 설명하진 못한다. 당시 군은 물론이고 정부 여당, 야당, 재야, 어디에도 하나회를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결국 서울의 봄을 좌절시킨 건 한국 사회 엘리트들의 한계였다.

영화는 이들이 군사주의적 남성성 위에 세워진 오합지졸의 네트워크였음을 잘 보여준다. 서로 “형님, 아우” 하는 무리를 이끄는 ‘걸출한 지도자’의 통치 철학이란 남성용 변기가 줄지어 있는 공중화장실에나 어울리는 것이고, 그 옆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는 자들은 ‘깡패’와 다르지 않다. 중심을 장악한 내부자들은 “서로 누가 회원인지도 모르는” 점조직으로 국가의 저인망까지 장악하고 있어서, 이와 싸우는 이태신이 돌리는 전화가 한통 한통 카메라에 포착될 때에도 그들의 광범위한 연락망이 가동되는 모습은 “연락 돌려!”라는 명령 한마디로 표현될 뿐 드러나지 않는다. 그게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조인 것이다.

‘아수라’에서부터 엘리트 남성들의 네트워크가 조폭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던 김성수 감독은 이제 문제의식을 현대 한국 사회의 뿌리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그 오합지졸의 무리는 블랙코미디에 담긴다. 어쩌면 국방부 장관을 연기한 김의성이야말로 이 영화의 골격을 이루는 최초의 장르다. “어디서 점이라도 봤어요?”(전두광), “이 사람 좀 믿어주세요”(노태건) 등의 대사는 영화가 품은 정치 풍자의 충동을 주저 없이 드러낸다. 이런 역사인식은 코미디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언어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블랙코미디에 충실한 건 아니다. ‘아수라’에서 누아르가 블랙코미디를 압도했듯이, ‘서울의 봄’은 ‘21세기의 반공영화’가 되어버렸다. 그걸 확정 짓는 건 영화의 결말부다. 큰 맥락에서 역사적 흐름에 충실했던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픽션의 영역으로 건너간다. 이태신이 전두광과 반란군 기지 앞에서 대치하는 장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여기가 바로 전두환이 아닌 전두광(황정민)이, 장태완이 아닌 이태신(정우성)이 스크린 위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순간, 이태신은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변신한다.

이태신은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며 아내가 옷가방에 넣어준 목도리를 맨다. 수경사 작전참모는 그런 이태신에게 “(사령관님도 살아서) 아들 입학식은 보셔야 하지 않겠느냐”며 출정 명령 철회를 건의한다. 물론 이태신은 거절한다. 그렇게 “똑똑한 아들”의 아버지, 정숙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정체성이 덧대어진 채로 군인-아버지 이태신은 개인의 영달보단 군인의 사명과 긍지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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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광 쇼’의 구경꾼으로 남을 건가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제껏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군사주의의 네트워크를 향해 낄낄거렸던 영화는 그 저열함을 깨트리고 나아갈 자는 육사 출신의 정치군인, 그 가짜 군인들과는 다른 갑종 출신,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투스타까지 오른 “진짜 군인”(영화 속 표현이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전의 순간 이태신을 굽어보는 세종로 충무공 동상이 나라를 지켜낸 한국 군인의 이데아로서 이를 비장하게 승인한다. 이 작품이 ‘21세기의 반공영화’라는 건, 적과 아군을 가르는 선명한 이분법 위에서 남성성을 재탐색하고, 이를 통해 국가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고전적 장르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군사주의에 대한 뛰어난 비평적 코멘트로 시작한 영화는 마침내 ‘좋은 군인 대 나쁜 군인’의 전쟁담으로 완성됐다. 그리고 스스로 타이틀로 걸었던 ‘서울의 봄’이란 이름을 배신한다.

서울의 봄은 무엇이었을까? 실현되지 못한 시민의 열망이었을까? 사실 1980년, 그 좌절에는 학생운동과 광주민중항쟁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지 않았던 시민들의 냉담함이 놓여 있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서울 시민은 전두광이 펼쳐놓은 쇼의 구경꾼으로 전락하는데 역사적으로 마땅한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봄을 군사 엘리트 내부의 싸움으로 축소하는 건 온당하지 않다. ‘서울의 봄’이란 이름으로 비판해야 할 건 군대를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여기며, 정치군인이 먹고살게 해주리라 믿었고, 그 위계와 폭력을 필요악으로 받아들였던 한국인의 시민성이다. ‘서울의 봄’은 군인들 간의 싸움에 집중함으로써 역사의 동인을 엘리트로 축소시켰고, ‘훌륭한 엘리트’의 얼굴에 ‘권위 있는 가장, 진짜 군인’의 얼굴을 덧입히면서 그토록 익숙한 군사주의적 상상력을 답습한다. 그러므로 저 장엄한 군가와 함께 영화가 마무리되는 건, 어쩌면 영화 내적으로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리고 이야말로 한국 영화시장의 대중성이자 상품성임은 이제 박스오피스 성적으로 증명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해지는 건 ‘서울의 봄’이 얼마나 군사주의에 복무하는가가 아니다. 얼마나 관객이, 우리가, 아니 내가, 역사 앞에서 군사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가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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