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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새큼한 김치 한입에 ‘세계인의 미소’가

Summary

지난달 20일 전남 장성군 천진암에서 정관 스님이 담근 김치. “아픈 마음,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알고 식재료와 내가 하나 되는 과정에 빠져들면 다른 데 ...

지난달 20일 전남 장성군 천진암에서 정관 스님이 담근 김치.
“아픈 마음,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알고 식재료와 내가 하나 되는 과정에 빠져들면 다른 데 신경 쓸 일이 없어지죠. 온전히 그 행위에 자신을 넣는 겁니다. 즐기게 되고, 그러면 치유가 됩니다. 음식을 만들 때마다 변화를 겪으면서 자기 성취, 만족이 생깁니다. 이런 경험이 많아지면 자유로워지죠. 견주는 마음이 없어야 마음의 병이 안 생기는데, 음식 만드는 과정과 나, 수행하는 마음을 하나로 만들다 보면 자신을 내려놓는 법, (그동안 자신을) 챙기지 않은 것에 대해 깨닫게 되죠. 비교 대상이 없는 상태, 마음의 병을 고치는 방법입니다. ‘음식명상’이 담고자 하는 거죠.”

특별한 체험 위해 백양사 천진암으로

지난달 19일 전남 장성군에 있는 백양사 부속 암자 천진암에서 만난 정관 스님이 한 말이다. ‘마음이 아픈 이들이 느는 한국사회에 사찰음식이 도움이 될 수 있느냐’는 기자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가 한 답이다. 과연 사찰음식은 저마다 극도의 불안을 안고 사는 한국인들에게 명약이 될 수 있을까. 지난달 20~21일 스님이 특별한 사찰 음식을 만든다고 해서 천진암을 찾았다.

정관 스님의 팬이라고 밝힌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온 외국인들이 지난달 20일 전남 장성군 천진암에서 정관 스님과 함께 김장을 하고 있다.
정관 스님은 18살에 출가해 대구, 전라도 영암 등 여러 사찰에서 수행하며 자연과 환경의 소중함을 체득한 한국 사찰음식의 대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 시리즈 ‘셰프의 테이블’ 시즌3(2017)에 출연해 세계적인 인물로 주목받았고 ‘뉴욕타임스’ 등 외국 여러 언론이 ‘요리하는 철학자’로 소개한 바 있다. 지난 5~6년간 천진암을 다녀간 세계적인 요리사와 미식가 수만 해도 수천명이 넘는다. 한식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요즘 그는 케이팝 스타보다 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뉴욕, 파리, 브뤼셀 등 전세계 초청 행사에 ‘등판’해 “기후위기 시대에 대안이 될 수 있는 사찰음식 수행”을 알리고 있다.

그가 만들겠다고 한 음식은 사찰김치다. 천진암 마당에는 절인 배추 150포기와 무 50다발, 갓 30다발이 커다란 플라스틱 함지박에 담겨 있었다. 사찰김치에는 젓갈이 들어가지 않는다. 불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채식김치라고 부르는 이유다. 매년 담그는 김치지만 정관 스님 김치 맛은 매번 다르다. 정해진 레시피가 없어서다.

“간이 싱거워! 이건 안 돼! 표고버섯은 더 불리고!” “누가 제피 가루를 이렇게 갈아!” 낮 12시. 스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일반 레스토랑이면 주방 스태프들이 공포에 가까운 긴장을 할 만한 타박인데, 서울에서 온 제자들부터 천진암에 머무는 요리사들까지 “네네!” 답하며 눈과 손이 빨라질 뿐이다. 활달하게 움직이다가 스님과 제자들은 그저 웃고야 만다. 이맘때가 되면 찾아오는 손님이 더 많아진다. 그들의 공양 준비도 정관 스님의 몫이다. 커리를 섞은 콩나물무침, 메밀가루를 묻혀 지진 무전, 표고버섯 조청 조림, 흑임자 알토란 들깨탕 등이 손님상으로 차려졌다. 이 중 표고버섯 조청 조림에는 사연이 있다. 그가 출가한 지 7년째 되는 해 부친이 찾아왔다. 부친은 노스님들에게 막말해가며 산에서 내려가자고 했다. “아버지는 ‘절에는 고기도 없고, 생선도 없고, 어찌 살겠느냐 가자’하시는데, 아버지를 모시고 계곡에 가 표고버섯 조청 조림을 해드렸지요. 아버지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느냐’고 하시면 내려가자는 말씀을 거두고 스님들에게도 사과하셨어요. 딸이지만 제게 삼배를 하시고 마지막으로 제 이름을 부르셨죠. 그해 돌아가셨어요.” 수행자답게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한차례 손님들이 다녀가고 햇살에 늙은 호박색이 입혀질 때쯤 ‘두수공방’ 오경순 대표를 비롯해 제자 10여명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무를 다듬고 갓은 물에 담갔다. 생강과 당근 껍질을 벗겼다. 김치 양념 재료다. 정관 스님은 암자 한쪽에 있는 부뚜막에 가 가마솥에 말린 표고버섯, 톳, 연잎, 다시마 등 여러 가지를 한데 섞어 끓이기 시작했다. 양념에 쓸 채수를 만드는 것이다. 이날 저녁상에는 콩나물과 깻잎순나물을 “덖은 것”이 차려졌다. 이른바 ‘스태프 밀’(식당 종사자들의 식사)이다. 그는 “사람들이 다 볶는데, 그러면 거칠어져요. 물 넣고 찻잎 덖듯이 덖어야 새 밥처럼 되고 부드러워지지요.” 종일 노동한 모든 이들이 모여 소박한 공양을 했다. 공양엔 성취감이 배어 있었다.

‘천진암 김장하는 날’에 방문한 손님들이 먹은 정관 스님의 사찰음식인 배추전(왼쪽)과 흑임자 알토란 들깨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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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하되 마음 열어놓으시라”

헝가리 음식작가 조피아 마우트네르, 벨기에 금용인 로이 피어송 등도 암자를 찾았다. 모두 정관 스님의 김치가 궁금해서 온 이들이었다. 산사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하지만 밤의 적막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님의 제자 5명이 더 왔다. 김장을 돕기 위해서다. 10명 넘는 ‘일본 손님’도 찾아왔다. 이들과 동행한 겐조 킴(김건삼)은 3살 때 일본에 가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요리사다. “거의 10년간 왔다. 다른 분들은 15년째다. 제대로 된 한식을 일본에 알리고 싶어서 여길 온다”고 말한다.

다음날인 20일 김장하는 날엔 손님이 더 모여들었다. 스님의 팬이라는 70대 이탈리아·프랑스 노부부 두 커플과 그들 안내에 나선 기업인 박대진씨 부부, 문체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최한 ‘비건 투어 코리아 2023’ 행사 참여차 한국을 방문한 25명의 미주·유럽 기자들도 함께 김장에 나섰다. 박씨는 “이들 외국인은 25년 지기인데, 스님을 직접 뵙고 싶다고 간청해서 암자로 연락해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스님의 김치가 궁금해진다. “찹쌀풀에 곱게 간 고춧가루, 소금, 청각 우린 물 정도 섞어 만든 양념을 사용해 담백하고 만드는 게 사찰김치죠. 소금이 매우 중요합니다. 20~30년 수행한 연장자 스님이 간해요. 저는 양념용 배추와 각종 채소, 청각, 표고버섯, 다시마 등을 함께 우려요. 양념은 묽게 해야 합니다. 농도 진하면 스님들 속이 불편해져요. 수행에 방해가 되죠. 바를 때도 슬쩍 양념에 담갔다가 빼는 식이여하죠.” 스님의 설명을 들어도 당최 이해되진 않는다. 오후 2시께 묽은 양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암자 마당엔 절인 배추 등을 버무리기 좋은 너른 상 여러 개가 차려졌다. 모두가 모여 스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올해 김치의 특이한 점은 탱자청을 넣는 겁니다. 7년 된 복분자청, 오미자청도 넣고요. 예전에 조청을 넣기도 했는데 올해는 탱자청! 발효음식(김치)에 발효된 것(탱자청 등)을 한 번 더 넣어주는 것이지요. 이 맛이 어떤 결과를 낼지 저도 모릅니다. 7년 간수를 뺀 신안천일염 썼고요. (삶아 찧은) 갓은 알싸해서 양념 맛을 더하죠. 토종 갓입니다.” 스님은 말을 마치자마자 찹쌀죽에 전날부터 끓인 채수를 붓는다. 여기에 다진 생강·청각·피망·홍고추·당근, 절 간장, 고춧가루, 소금, 복분자청, 오미자청, 탱자청, 갓 등을 섞어 양념을 만들었다. 절인 배춧잎을 한 장씩 얇게 펴서 살살 아기 뺨 어루만지듯이 바르기 시작했다. “양념 많이 넣으면 안 됩니다. 켜켜이 넣지 마세요.” 스님의 당부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스님과 함께 김장했다. 조피아 마우트네르가 말했다. “헝가리인들은 김치에 열광합니다. 매우 신선하고 맵지만 복잡한 풍미가 느껴져요. 놀라운 경험입니다.” 샐러드처럼 아삭아삭한 식감, 그리 맵지 않은 새큼한 맛. 곳곳에서 맛본 외국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직접 만들어서, 함께 만들어서 더 뿌듯한 성취감이 들었다고 했다. 이날은 김장하는 날이 아니라 세계인의 김치 축제의 장이었다. 그들의 손에 들인 김장김치에는 뿌듯함이, 기분 좋은 매콤함이 배어 있었다. 세상 만물과 공존하려는 사찰음식에선 스님 말대로 치유의 가능성이 내재돼 보였다. 그의 마지막 당부가 천진암 하늘에 펴졌다. “‘비건’한다면서 ‘이것은 안 돼! 저것도 안 돼!’ 하지 마시라. 나를 알아가는 데 있어서 마음이 좁아지고, 자기의 삶을 좁게 만들고 옭아맵니다. ‘비건’을 하되 마음을 열어놓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나에게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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