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한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51). 페트렌코와 베를린 필 조합의 첫 내한이었다. 빈체로 제공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의 이례적인 ‘내한 러시’가 마무리됐다. 1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롯데콘서트홀 공연이 대미를 장식한다. 유럽의 명문 10개 악단은 10월과 11월에 집중된 내한 공연에서 명성에 걸맞은 빼어난 연주로 국내 청중의 귀를 호강시켰다. 조성진(29), 임윤찬(19) 등 스타 연주자들에 대한 극심한 쏠림 현상 등 저변이 좁은 한국 클래식 시장의 빛과 그늘도 새삼 확인됐다.
이목은 11월 둘째 주에 집중된 ‘빅3 악단’에 집중됐다. 베를린 필과 빈 필, 로열콘세르트헤바우가 동시에 내한해 펼친 ‘서울 빅 매치’였다. 뉴스와 화제는 단연 베를린 필이었다. 2019년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키릴 페트렌코(51)는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를 꺼리는 ‘은둔형 지휘자’로 불린다. 그와 베를린 필 조합의 첫 내한이라 더욱 관심이 쏠렸다. 페트렌코는 실험보다 정석을 택했다. 강세와 템포를 신속하게 전환하며 교과서적인 연주를 들려줬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내년 상주 음악가(Artist in residence)로 선정했다는 소식도 화제였다. 베를린 필은 최근 작곡가 진은숙 작품집을 발매하고 카카오톡에 한국어 채널을 개설하는 등 한국 청중과 접점을 넓히고 있는데, 온라인 영상 서비스인 ‘디지털 콘서트홀’을 홍보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3년 연속 내한한 빈필은 지휘자 투간 소키예프(46)가 청중 시선을 사로잡았다. 첫날은 맨손으로, 둘째 날은 지휘봉을 잡고 지휘한 그는 손짓이 유려했고, 풍부한 표정에 발레리노 같은 몸짓도 경탄을 자아냈다. 베를린 필이 왜 그를 12차례나 객원지휘자로 불렀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는 “아름다움이 그 규모와 형식이 아니라 섬세함으로부터 나오는 음악은 빌 필이 가장 잘한다”고 말했다.
3년 연속 한국을 찾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번엔 러시아 태생 투간 소키에프(46)를 지휘자로 선택했다. wcn 제공
내실에선 파비오 루이지(64)가 이끈 로열 콘세르트헤바우였다. ‘벨벳 현악부’란 별칭처럼 풍성하고 윤기 흐르는 사운드였다. 2018년부터 상임 지휘자가 공석인데도 기복이나 흔들림이 없었다. 황장원 평론가는 “현의 주선율이 두터운 강물을 이루며 굽이치는 가운데 지휘자의 지시 없이도 제 타이밍에 적절한 음량으로 알아서 척척 나와주는 목관 주자들의 기량에 감탄했다”고 평했다. ‘빅3’ 악단의 우열을 가리긴 어렵다. 청중의 취향과 연주 프로그램에 따라 악단에 대한 평가와 호불호가 갈리기 마련이다. 허명현 칼럼니스트는 “이 정도 레벨쯤 되는 오케스트라면 당일 컨디션에 따라 연주력이 결정된다”며 “어느 오케스트라가 더 잘한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명문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은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파비오 루이지(64)가 이끌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다크호스는 체코 필하모닉이었다. 처음 한국을 찾은 명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71)의 조련을 거친 이 악단 연주에 여러 평론가가 최상급 평가를 매겼다. 노승림 숙명여대 교수는 “악단 고유의 소리나 개성이 사라지고 비슷비슷해지는 흐름에서 보기 드물게 독창적인 전통을 보여줬다”고 후한 점수를 줬다.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도 “현악군의 웅숭깊은 소리는 세월의 바람을 맞아 착 가라앉은, 흉내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며 “보헤미안 악사들 솜씨나 비치코프의 지휘 모두 최고였다”고 호평했다. 박제성 평론가는 “음색이 예스러운데 고급스럽다”며 “비치코프는 역시 명 지휘자”라고 말했다. 황장원 평론가는 “악단 고유의 전통과 매력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스타일과 해석도 명확하게 부각하는 거장 비치코프의 솜씨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고 평했다.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45)와 전통 깊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도 눈길을 끌었다. 태권도 애호가로 알려진 넬손스는 공연 와중에 틈을 내 서울 강남구 국기원을 찾았다. 대구 공연 뒤엔 즉석에서 짧은 연설도 했는데, 높은 몰입도를 보여준 관객들에게 받은 감동을 표시했다. 이번 내한에서 넬손스를 수행한 안일구 플루트 연주자는 “넬손스가 ‘서울과 대구 공연은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라고 말했다“고 유뷰트 ‘일구쌤’에서 전했다. 이밖에 스위스 톤할레, 오슬로 필하모닉, 런던 필하모닉, 뮌헨 필하모닉,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도 한국을 찾았다.
명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71)가 이끈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에 여러 평론가들이 최상의 평가를 내렸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실력을 검증받은 유럽 일류 악단들도 국내에선 조성진, 임윤찬 ‘진찬 투톱’의 티켓 파워를 넘어서지 못했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뮌헨필과 임윤찬이 협연한 지난 29일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2954명의 청중이 대극장을 가득 메웠다. 클래식 전용 공연장이 아닌데도 유료 객석 점유율이 99%에 이르렀다. 지난 8월 티켓 판매 1분 만에 전석 매진이었다. 임윤찬과 뮌헨필의 4차례 협연 모두 일찌감치 완판됐다. 조성진의 기세도 여전하다. 베를린 필에 이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와 협연했는데, 전석 매진이었다. 같은 악단이라도 두 연주자가 협연하지 않은 공연은 더러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국제적 명성을 지닌 악단들조차 ‘진찬 투톱’의 티켓파워에 의존해야 했다는 얘기다. 전석 매진을 기록한 홍콩 필하모닉 공연은 특이한 사례다. 지휘자도, 악단도 다른 유럽 악단들에 견줄 정도의 명성이 아닌데도 완판을 기록했다. 열성 팬을 몰고 다니는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28)의 힘이란 분석이 많다. 이 공연을 기획한 프레스토 박태윤 대표는 “청중의 뜨거운 반응에서 조성진, 임윤찬에 이은 양인모의 티켓 파워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정명훈(70)이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임윤찬(19)이 협연한 11월 29일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3천여명의 청중이 대극장을 가득 메웠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강력한 흡인력을 지닌 스타 플레이어는 새로운 관객층을 만들어내며 클래식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반면, 뛰어난 역량을 지닌 다른 연주자들을 소외시키는 측면도 있다. 실력이 좋다고 모두 스타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10대와 20대의 젊은 연주자들에 대한 지나친 열광이 결과적으로 이들의 음악적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평론가는 “조성진, 임윤찬이 짧게 빛나는 반짝스타가 아니라 긴 생명력을 지닌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주변에서 지켜주는 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임석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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