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다섯손가락 출신 가수 이두헌. 이두헌 제공
청년 이두헌은 서울 지하철 숙대입구역 근처 2층 커피숍 창가에 앉았다. 어머니 가게였다. 어머니는 음악가로 성공한 아들이 오는 걸 좋아하셨다. 1980년대 중반, 그가 속한 밴드 다섯손가락은 ‘새벽 기차’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풍선’ 등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두헌은 종종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길에는 수녀가 지나가고, 약국엔 담배 간판이 붙어 있었다. 구두닦이 청년과 껌팔이 소년도 보였다. 손님을 찾으러 커피숍에 들어온 구두닦이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중학교 동창이었다. 하지만 그 청년은 모른 척 외면했다. 이두헌은 이 장면을 노래로 만들었다. 다섯손가락 3집(1987) 수록곡 ‘이층에서 본 거리’다.
밴드 다섯손가락 출신 가수 이두헌. 이두헌 제공
원래 가사는 이랬다. “수녀가 지나가는 그 길가에서/ 어릴 적 내 친구는 구두를 닦고/ 길거리 약국에서 담배를 팔 듯/ 세상은 모순 속에 깊어만 가고/ 분주히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온종일 껌을 파는 아이도 있고…” 당시 사전심의 기구인 공연윤리위원회는 빨간 줄을 죽죽 그었다. 결국 “어릴 적 내 친구는 외면을 하고” “세상은 평화롭게 갈 길을 가고” “온종일 구경하는 아이도 있고”로 바꿔야 했다.
“다섯손가락을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노래로만 기억하시는 분이 많은데, 사실 세상에 대한 고민도 적잖이 담았어요. 3집의 ‘전자오락실에서’에 ‘전자오락실에서 무수히 많은 비행기들을 부셔버리고 나서 꿈을 꾸었지/ 무죄의 비행기들이 하나둘 소복을 입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런 꿈을 꾸었어’라는 가사를 붙였더니 심의기관에서 다 뜯어고치라는 거예요. 그래서 가사를 지우고 연주곡으로 바꾼 적도 있어요. 훗날 4집에 노래 버전을 다시 넣었죠.”
다섯손가락 이두헌이 ‘불꽃밴드’에서 ‘이층에서 본 거리’를 부르는 모습. 방송 영상 갈무리
지난 29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두헌이 말했다. 다섯손가락은 지난달 종영한 밴드 경연 프로그램 ‘불꽃밴드’(MBN) 파이널 무대에서 ‘이층에서 본 거리’를 불러 6팀 중 최고점을 받았다. “중간에 기타 줄이 끊어져 당황했지만 어떻게든 마쳤더니 객석에서 기립박수가 나왔어요. 이후 원곡이 역주행하는 등 화제가 됐어요. 덕분에 밴드 멤버들이 더 끈끈해지고 자신감도 생겼죠.”
록 밴드로 데뷔했지만 자신의 음악적 뿌리는 포크와 블루스라고 그는 말했다. “초등학생 때 동네 음반가게에서 한대수의 ‘바람과 나’를 듣고 꽂혔어요. 김민기 노래도 좋아했고요. 중학생 때는 음반가게 형 소개로 당시 중앙대 밴드 블루드래곤 소속이던 김성호 형을 찾아갔어요. 기타와 음악을 배우며 수제자처럼 됐죠. 대학생 때는 정태춘님을 따라다녔고요.”
가수 이두헌이 최근 제주 애월에서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공연하는 모습. 이두헌 제공
그는 김광석에 대한 기억도 떠올렸다. 1995년 겨울 미국 보스턴 버클리음대 유학 시절, 김광석이 찾아왔다. 뉴욕 공연차 왔다가 들렀다고 했다. “음반사 전속 가수는 곡이 히트해도 돈을 많이 못 벌지만, 가수가 직접 제작하면 제법 돈이 된다. 그러니 한국 와서 음반 내라”는 김광석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친구 속물 됐나?’ 얼마 뒤 김광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상했어요. 참 밝았는데…. 마지막 만남에서 그를 오해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메시지가 아니었나 싶었어요. ‘어서 한국에 와서 나와 함께 음악을 하자’는.”
그게 짐이 되어 김광석처럼 통기타 하나 메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다시 소극장’이란 이름으로 소극장 무대에 꾸준히 섰다. 경남 하동 차밭과 지리산학교, 시골 양조장·방앗간 등 전국 곳곳을 찾아가 노개런티로 노래하기도 했다. 그렇게 거의 20년을 해왔다. 오는 12월11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에서 하는 공연도 그 연장선상이다.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다섯손가락 시절 노래, 솔로 미발표곡, 김민기 노래 등을 들려줄 계획이다.
“치장이 사라지면 오롯이 음악에 집중하며 날것의 깊이를 느낄 수 있어요. 김광석의 학전 소극장 1천회 공연까진 아니어도 앞으로 소극장과 전국 방방곡곡 100회 공연을 해서 그런 문화를 이어가려 합니다. 이번 공연은 그 출사표 같은 무대예요. 예순을 앞둔 제가 하는 걸 보고 후배 가수들도 동참하면 좋겠어요.”
그는 내년 3월로 예정된 학전 폐관 소식을 안타까워하며 학전 살리기 릴레이 공연에도 참여하기로 했다고 귀띔했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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