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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함량 노랑이’가 고통을 즐기지도 피하지도 않고

Summary

한국계 미국 작가를 대표하는 이창래(58). 9년 만의 신작 ‘타국에서의 일 년’은 스무살 ‘유사 백인’ 청년의 성장기를 다룬다. RHK 제공 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

한국계 미국 작가를 대표하는 이창래(58). 9년 만의 신작 ‘타국에서의 일 년’은 스무살 ‘유사 백인’ 청년의 성장기를 다룬다. RHK 제공
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l RHK l 2만2000원

한국계 미국 작가군을 대표하는 이창래(58)가 9년 만에 내놓은 신작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그간 이창래는 주지된 과거로부터 인물을 오늘로 데리고 왔다. ‘정체성’이야말로 과거형 서사 아닌가. 세 살 때 이민 가 영어로 소설 쓰는 이창래를 미국 문단에 수직 착륙시킨 ‘영원한 이방인’(1995)의 한국계 이민자 헨리 박,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생존자’(2013)의 한국인 전쟁고아 준 등도 예외가 아니다.

‘타국에서의 일 년(My Year Abroad)’은 오늘의 인물을 미래로 떠밀어 보낸다. 에스에프(SF)란 뜻이 아니다. 미래는 당도하지 않은 때요 아직 속해지지 않은 시공간이다. 누구도 점유하지 않은 ‘내일’로 저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자아, 소속, 정체성을 확립해가(려)는 아주 느린 성장기.

690쪽 장편을 한 줄로 추리자니 그러할 뿐 성장은 결코 사칙연산처럼 전개되지 않는다. 상처 하나를 더해 한뼘 성장이 산출되지 않는다.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느니 어둠에라도 속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늘 내가 태어난 직후부터 어정쩡한 것들의 강에 담긴 것만 같았다”는 주인공의 말마따나, 정체가 흐릿한 당대 청춘의 설익은 환멸과 부유는 때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물들을 연상시킨다. 인종, 자본, 문화적 차별과 착종이라는 실로 거대한 미국사회에서 결코 양상도 결과도 같을 수 없는 방황이긴 하지만 말이다.

스무살 틸러 바드먼은 중산층 ‘백인’ 남자다. 미국 뉴저지주의 “역사적이고 고전적인 백인 마을” 출신이다. “작고 값비싼 대학” 2학년이다. (이창래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가르칠 때 살았던 지역을 닮았고, 작가의 실제 경험과는 다르게) 인종차별을 당할 이유가 딱히 없다. 하지만 막상 틸러에겐 8분의 1의 한국계 피가 섞여 있다. 하파(아시아계 혼혈)라 하기엔 또렷하지 않은, 12.5%의 “저함량 노랑이(Low yellow)”. 이 정체가 되레 차별을 체험시킨다. 유색인종에겐 직접 뱉지 않을 혐오, 비하의 발언을 백인들끼리 점잖고 평화롭게 나누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고급 스키장을 간 아시아계 미국 청년이 한 리프트에서 은퇴한 백인 부부와 소속 대학, 장래희망에 관해 교양 있게 얘기 나눈다. 청년의 얼굴은 고글로 드러나지 않는다. 헤어질 때 노부부가 건네준 말은 “슬로프 마음껏 즐기시게”였다. ‘on slope’(슬로프 위에서)가 아닌 “with slope”(슬로프와 같이). 아시아인 비하 은어(치켜올려진 눈매를 빗댐)와 스키장의 중의로 ‘여기 아시아인들도 있다’는 어떤 속내를 백인들끼리 주고받으려 했던 것이다.

틸러에게 한국계 혈통을 물려준 어머니는 오래전 가출했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아버지로부턴 관심받지 못하는, 무중력, 무목적의 표연하는 잎 하나가 바로 틸러다. 그가 휴대폰 문자 하나를 달랑 남기고 해외로 떠날 수 있는 것도, 이에 아버지의 답장이 “오키도키” 달랑 한 마디인 것도 이들 부자에겐 더덜없는 행동들이다.

유사 백인, 유사 중산층, 유사 성년의 틸러에게 부모의 구실 내지 삶을 확장시키는 이는 같은 지역에서 만난 중국계 거부 퐁 로우다. 틸러 나이쯤 이민 온 화학자로 여러 사업체를 거느린다. 퐁은 돈을 좇지 않는다. 둘은 퐁의 요거트 가게에서 만나 호감을 느낀다. 퐁은 동남아시아 기반의 사업에 틸러를 동참시킨다. 그의 가족, 지인, 사업 파트너를 소개하고, 술을 권하고, 그의 과거를 들려준다. 퐁이 강한 중국식 억양의 영어로 구사하는 화술은 비범하다. 말의 밀도와 정확성은 상대를 두렵게 한다. “그와 얘기하다 보면 세상을 다시 검토하고 이곳이 생각보다 평범한 곳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퐁이 아주 길게 회고하는 문화대혁명의 상처는 소설 속 소설처럼, 한편의 응축된 인류 미시사다. 파멸된 부모를 떠올리며 퐁은 말하고 틸러는 거듭 사로잡힌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기보다는 고통스럽고 슬퍼져. 나 자신 때문이라기보다는 가엾은 어머니와 아버지 때문이야. 두 분은 아무 잘못도 없었어. 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최소한 내게는 내 몫의 달콤함이 있었지. 나는 언제까지나 그걸 기억하고 싶어.”

어떤 미래에 ‘연루’되든, 자기 몫의 달콤함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그 몫엔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리라. 틸러는 퐁과 어울리며 “나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언했듯, 어떤 성장도 사칙산을 따르지 않는다.

이를 증명하는 자가 퐁을 따라 아시아 여러 도시에서 1년을 보낸 뒤 돌아온 틸러 자신이다. 소설의 또 다른 축이기도 하거니와, 틸러는 홍콩 공항에서 우연히 도움을 주면서 인연 맺은 삼십대 여성 밸과 동거한다. 틸러가 밸과 그의 8살 아들을 책임감과 사랑으로 대하면서도 동시에 밸에게 어린아이 취급받는 장면은, 실제로 아직 아이이기 때문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또한 스스로를 “다루기 쉬운 소년”이라고 자족 내지 자조한다.

왜일까, 무슨 의미일까. 소설 말미로 갈수록 답보단 질문이 쌓일 법하다. 퐁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나름의 반전이라 구체적인 건 생략한다-이 되어 있고, 자살하려던 밸은 ‘어린’ 틸러로부터 목숨을 구하고 생을 나아간다. 전반의 성장 기조가 전복되는 셈이다. 어느 경험도 깊은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즉, 이 시대 젊은 ‘틸러’들에게 내일을 맞는다는 것은, 거친 바다 위 조타수(Tiller, 틸러)처럼 고난을 대면하고 상처에 진입한다는 얘기가 아닐까. 그때 ‘제 몫의 달콤함’이 있다. 2021년 2월 소설 출간 당시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고통을 즐기지 않고, 축하하지 않고, 피하지 않은 것에 관한 책”이라고 이창래가 답한 이유일 것이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중요한 건 탈출보다 그 상황에 진입하는 방식”이란 틸러의 고백과 맞닿아 있다.

소설엔 짚어볼 요소가 적지 않다. 성장의 모든 소요는 새로 관계 맺는 대부분의 아시아계를 통해 마련된다. 밸 또한 중국계이고, 퐁의 아내는 일본계이다. 음식이, 마치 하루키의 음악처럼, 펼쳐지고 유머가 더해지며, 되레 어느 누구보다도 미국적인 -하지만 미세하게 시작점이 다른- 틸러의 내일을 전망하게 한다. 거대담론의 이민사 너머, 이제 엠지(MZ) 그대들은 그대의 노래를 부르고, 그대의 음식을 만들라, 이창래는 말하는 듯하다.

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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