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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현대사가 부르짖은 ‘하늘에 계신’ 사악한 ‘아버지’

Summary

2009년 1월 스리랑카 내전 중 반니 마을을 떠나는 주민들. 정부군과 타밀 엘람 호랑이 해방군(LTTE) 간 25년여 전쟁을 촉발시킨 1983년 ‘검은 7월’ 당시 싱할라족들의 ...

2009년 1월 스리랑카 내전 중 반니 마을을 떠나는 주민들. 정부군과 타밀 엘람 호랑이 해방군(LTTE) 간 25년여 전쟁을 촉발시킨 1983년 ‘검은 7월’ 당시 싱할라족들의 폭동으로 타밀족 5638명이 죽고 15만명이 집을 잃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지음, 유소영 옮김 l 인플루엔셜 l 1만8800원

지난주 발표된 노벨문학상과 함께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이 다음달말로 다가왔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5월 선정된 바 있다. 영연방권에 출간된 번역 작품이 대상인데, 2022년 이 부문 최종후보에서 탈락한 노르웨이 극작가 욘 포세(64)가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장편소설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은 2022년 부커상에 만장일치로 선정된 스리랑카 출신 작가 셰한 카루나틸라카(48)의 작품이다. 생애 두번째 소설로, 최종 경쟁후보였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장편 ‘오, 윌리엄!’)도 물리쳤다. 이변이었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건 소설 자체다.

최근 국내 출간으로 확인되는 진수는 스리랑카의 참혹한 과거사를 복기하는 작가의 창의성이다. 추리 스릴러의 외투 속에 해학과 풍자, 판타지를 가득 덧댄 채 수십년 이어진 살육전의 상흔, 그럼에도 절멸하지 않는 인간성, 그 최소단위라고 할 사랑을 캐물어 가는 도정이 돋보인다. 부커상 심사위는 “분노에 찬 코믹(angrily comic)”이라고 평했고, 작가 자신은 “웃음이 확실한 우리의 대응 원리”라고 말한다.

쓸 수 없는 것은, 그렇게 쓰여진다.

스리랑카 출신 작가 셰한 카루나틸라카(48). 사진 부커상 누리집
소설의 배경은 1980년대 스리랑카다. 1955년생 사진작가 말리는 도박이 취미고, 위트와 활력이 넘치며 남자에게 더 성적 매력을 느낀다. 서른다섯살이 되던 1990년, 말리는 처참히 살해당한다. 아버지가 싱할라족, 어머니가 타밀족인 사실과는 무관하다. 그는 이생과 후생 사이 ‘중간계’에서 배회하며 죽은 이유 나아가 사라질 수 없는 이유를 좇게 된다. 숱한 원혼들을 만나면서다. 그가 이미 사진으로 찍거나 거리에서 만났던 이들, 신문기사로 보았던 이들이다. 왜 아니겠는가.

스리랑카는 식민제국 영국이 다수민족인 싱할라족 대신 소수인 타밀족을 차별 등용하다 해방(1948년)이 되면서 민족·종교·이념 분쟁을 맞는다. 60~70년대 싱할라족의 타밀족 학살, 정부의 반체제 인사들 탄압에 덧대어 1983년 타밀 분리주의자들이 무장투쟁하며 내전의 수렁으로 빠진다. 물경 25년이 넘는 전쟁이었다.

그해 타밀 반군의 정부군 습격에 격분한 싱할라족들이 7월말 수도 콜롬보에서 타밀족을 마구 죽이는 참상(‘검은 7월’로 불리는 83년 폭동)을 말리는 카메라에 담는다. 이후 그의 필름은 타밀군의 테러, 정부군의 타밀족 학살, 좌파 살인 현장, 인도군의 개입과 만행, 영국인 무기상 등으로 채워진다. 말하자면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진”이요, “전쟁을 멈출 수 있는 사진”이지만 기억되길 원치 않는 세력들에겐 찾아 없애야 할 사진이다.

중간계에서 말리가 만나는 이들은 실제 사건 내지 살육의 형태를 소환한다. 타밀반군의 테러조직을 폭로했다 타밀 극단주의자에게 살해당한 온건파 라니 스리다란 박사, 인민해방전선을 이끌다 죽임당한 하층민 출신 세나, 정부군에 의해 300여명 한꺼번에 몰살 매장된 고교생들(수리야칸다 암매장)…. 말리 또한 1990년 정부가 암살한 언론인·작가·배우인 리처드 드 소이사(1958~1990)를 모델로 한다. 리처드의 말이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저는 그럴 수 없나이다”였다.

머리를 들고 다니던 한 노인은 말리에게 따진다. 머리 없는 자기 시체를 찍고선 사진설명에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인은 말한다. “틀림없이 사후세계가 에어랑카 항공사 광고 같은 거라고 생각했겠지?… 혹시 사후세계는 고문실 같은 거라고 상상했나? 정부의 폭탄 공격과 반군이 설치한 지뢰 사이에서 새우등이 터지는 민간인 같은 사후?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이름 때문에 잡혀서 두들겨 맞는 사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은 지옥, 한창 성업 중이지.”

소설은 두 가지 고정 관념을 비틀면서 메시지를 증폭시킨다.

첫번째는 중간계를 지나 닿는, 환생 가능한 “빛”의 세계다. 완전무결로 보이는 빛의 세계는 그러나 이전 세계를 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너무 강한 빛은 필름을 백화해버리는 것과 같다. 세나는 중간계의 원혼들에게 이생을 기억해야 하고, 복수는 권리라 주장한다. ‘빛’을 거부하자는 거다. 반면 라니는 “중간계는 절망을 먹고 사는 존재로 가득 차 있다”며 빛의 세계를 종용한다. 그에겐 이제 복수가 정의도 희망도 아니다. 일곱번 달이 뜨는 동안 말리가 선택해야 할 갈래이고, 그 기간 ‘빛’에 닿지 못하면 영영 중간계에서 악귀가 되기도 한다.

두번째는 말리를 죽인 자의 실체와 연루한다. 말미에 이르러 드러나는 범인은 아무렴 예상 밖일 것이다. 스포일러를 피하되, 서두에 실린 ‘등장인물 소개’가 힌트는 될 법하다. ‘말리의 삶에 허락되지 않았던 사랑’ 딜런과 ‘말리가 소홀히 했던 사랑’ 재클린(딜런의 사촌)의 존재다. 말리가 죽어서도 지키려 한 것은 오직 이들이다. 민족도 역사도 정의도 복수도 아닌, 사랑. 그것으로 인간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사라져도 잊히지 않는다.

작가는 부커상 최종후보 인터뷰에서 “(스리랑카의) 지금을 다룰 용기가 없어 20년 전의 암울했던 시절로 거슬러갔다”고 했다. 5년을 집필했다. 2020년 인도에서 먼저 출간했으나, 영미권 출판사는 2년간 찾지 못했다. 스리랑카 현대사를 왜곡시킨 장본인 영국이 그러고선 부커상을 안겼다.

번뜩이는 수사와 지적 유희, 리듬감은 흔치 않은 2인칭 화법에 기대 소설 500여쪽을 거뜬히 유지한다. 작가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바, 미국 소설가 커트 보니것(1922~2007)류의 냉소적 음색도 놓칠 수 없다. 때로 슬픈 풍경이 우스워지고 이윽고 살천스럽다.

“어떤 똥이든 거슬러 올라가면 싼 놈은 국회의원이다.”

“사후조차 대중의 어리석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말리는 빛의 세계로 갈까. 빛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을까. 환생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 정작 지워야 할 것은 분노의 기억이 아닌 듯하다. 모든 ‘근대’와 모든 ‘아버지’의 신화를 망각하라는 듯, 소설은 살부(殺父)의 관념을 숨기지 않고 있다.

말리는 죽어 생각한다.

“세상의 광기를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는 네 아버지와 같을 것이다. 부재하고, 게으르며, 아마도 사악한 존재….”

“한 가지만 해, 그걸 잘하란 말이다.” 이렇게 말하던 대디(아버지)의 ‘한 가지’에 아버지 노릇은 없었다.”

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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