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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네가 내 엄마야?” 선 넘는 팬덤…분연히 떨치고 성공한 슈퍼스타

Summary

도자 캣이 지난 5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연구소 행사에 도착해 레드카펫을 걷고 있다. EPA 연합뉴스 낯선 사람이라는 제목의 칼럼에는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

도자 캣이 지난 5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연구소 행사에 도착해 레드카펫을 걷고 있다. EPA 연합뉴스
낯선 사람이라는 제목의 칼럼에는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가 낯선 사람인지 경계를 잘 조정해야 하는 탓이다. 누군가에게는 낯선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낯익은 사람이 된다. 옛날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낯선 사람에 해당한다. 1980년대 가수는 엠제트 세대 독자에게는 대부분 낯선 사람일 것이다. 요즘 사람도 어느 정도는 낯선 사람이 된다. 2020년대 가수는 베이비붐 세대 독자에게는 대부분 낯선 사람일 테니까 말이다. 이 경계는 이 칼럼을 신문 지면으로 읽느냐, 인터넷으로 읽느냐에 따라 또 달라진다. 신문 지면으로 이 칼럼을 대하는 독자는 대부분 나보다 더 나이가 지긋하신, 아니다. 요즘 일간지들은 어떻게든 지면 부수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거기에 초치는 발언은 하지 않기로 하겠다. 어쨌든 지금 소개하려고 하는 낯선 사람은 지금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라 있는 뮤지션 ‘도자 캣’이다. 누군가에게는 낯설지만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유명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팬이란 무엇인가

도자 캣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팬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팬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팬이라는 단어는 영어인 퍼내틱(fanatic)에서 왔다. 열광을 떠나서 거의 광신적이라는 의미의 단어다. 그러니 당신이 누군가의 팬을 자처한다면 그건 그를 대충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를테면 내가 아는 누군가는 1980년대에 프랑스 배우 크리스토퍼 램버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의 국제적 팬클럽에 가입해 세계의 팬들과 펜팔이 되어 편지를 주고받았다. 심지어 램버트가 직접 쓴 편지를 받은 적도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팬이라 뻐기면서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팬심이라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지만 최근 생애 최초로 팬클럽에 가입했다. 뉴진스 팬클럽이다.

소셜미디어 시대가 개막하면서 유명인들에게 팬의 존재는 더욱 중요해졌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팬인 당신이 유명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네이버나 네이트 카페의 팬클럽에 가입해야만 했다. 가입 신청 방법도 까탈스러웠다. 상당히 폐쇄적인 커뮤니티였다. 지금은 다르다. 소셜미디어를 하는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유명인과 소통할 수 있다. 팬덤 문화라는 것은 점점 강력해지고 있다. 한국 뮤지션들, 특히 아이돌에게 팬덤의 존재는 어쩌면 지나치게 중요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2020년대의 팬들은 이제 그저 좋아하고 열광하고 갈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요청한다. 요구한다. 때로는 통제한다. 호통친다. 그들은 사랑하는 아이돌의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스타일리스트 교체를 요구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연애를 하면 전광판이 달린 트럭으로 소속사 앞에서 시위를 한다. 자, 그렇다면 대체 연예인과 팬은 서로의 관계를 어디까지 허락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정확하게 도자 캣에게 생긴 일이다.

‘키스 미 모어’ 뮤직비디오 장면. 뮤직비디오 화면 갈무리
“내 팬이 되어달라고 한 적 없어”

먼저 도자 캣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1995년생 도자 캣은 미국의 가수이자 래퍼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재미있게도 그는 너무나도 2020년대적인 방식으로 유명해진 가수다. 도자 캣은 2018년 데뷔 앨범 ‘아말라’(Amala)를 발매했지만 딱히 관심을 끌지 못했다. 요즘은 데뷔 앨범부터 성공하지 않으면 딱히 희망이 없다. 기회는 두번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2019년 내놓은 노래 ‘세이 소’(Say So)가 쇼트폼 플랫폼인 틱톡에서 일종의 밈(meme)이 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그 노래를 틀어놓고 챌린지 영상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세이 소’는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도자 캣에게 빌보드 싱글차트 1위라는 기록을 안겼다. 2021년 발매한 새 앨범 ‘플래닛 허’(Planet Her)의 수록곡인 ‘키스 미 모어’(Kiss Me More) 역시 큰 인기를 누렸다. 도자 캣은 이 노래로 첫번째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그때까지 도자 캣의 이미지는 앨범 제목처럼 ‘핫’한 ‘핑크’였다. ‘세이 소’와 ‘키스 미 모어’는 아주 발랄한 느낌의 신스팝이다. 만약 그의 노래를 한번도 들어본 적 없다면 지금 두곡을 연속으로 재생해보시라. 누가 들어도 몸이 절로 살랑살랑 움직이는 사랑스러운 팝송이다. 도자 캣은 2020년 이후 한국의 많은 여성 뮤지션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이미지와 노래의 분위기를 비슷하게 따라 한 노래도 있지만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기로 하겠다.

도자 캣 팬들은 소셜미디어에서 스스로를 새끼 고양이들이라는 의미의 ‘키튼즈’(Kittenz)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방탄소년단에게 아미가 있고 뉴진스에게 버니즈가 있다면 도자 캣에게는 키튼즈가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도자 캣이 아티스트로서 원했던 것일까?

어쩌면 아니었을 것이다. 새 앨범 발매를 앞둔 올해 7월 도자 캣은 팬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발단은 도자 캣의 연애였다. 그의 새 남자친구가 과거에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기사들이 나오자 팬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와는 헤어지라고 일종의 소셜미디어 운동을 일으켰다. 도자 캣은 ‘키튼즈’에게 싸움을 걸었다. 소셜미디어에 “내 팬이라면 그런 괴상한 이름으로 스스로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제발 휴대폰 좀 끄고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거나 부모님 일이나 도우라”고 포효했다. 놀란 팬들이 “평소처럼 팬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듣고 싶다”고 하자 “난 너희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 팬이 되어달라고 강요한 적도 없다. 왜 내 엄마처럼 구는 건지 모르겠다”고 받아쳤다. 팬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24시간 만에 인스타그램 팔로어 20만명이 떨어져 나갔다. 팬들은 “네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건 우리 같은 팬이 있기 때문이다. 넌 팬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가 없었다면 고등학교 중퇴생인 너 따위는 마트에서 일하거나 차고에서 노래나 만들고 있었을 것”이라고 분노를 쏟아냈다. 도자 캣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예전 앨범은 그냥 돈벌이용 팝 앨범이었을 뿐”이라며 “니들이 그저 그런 노래들을 소비해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섬에 가서 놀 수 있었다”고 소셜미디어에 썼다. 논란이 계속되자 당시 한국 언론과 커뮤니티들은 도자 캣의 커리어가 완전히 끝났다고들 했다. 팬덤이 등을 돌리면 어떤 뮤지션도 더는 성공할 수 없다고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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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더 타운 레드’ 뮤직비디오 장면. 뮤직비디오 화면 갈무리
손님은 왕? ‘2020년대 왕’의 완패

아마도 그건 너무나도 한국적인 반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서구권 국가들은 아티스트의 사생활 논란과 그들의 결과물을 어느 정도는 분리해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도자 캣의 커리어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논란이 지속되던 가운데 새 앨범 ‘스칼릿’(Scarlet)을 발매했다. 전작들과는 완전히 다른 경향의 앨범이었다. ‘세이 소’와 ‘키스 미 모어’처럼 달달한 팝송은 전혀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여성 래퍼 니키 미나즈와 카디 비 음악조차 말랑말랑하게 들릴 강력한 랩으로 가득했다. 이게 성공할 수 있을까? 압도적인 성공이었다. 현재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페인트 더 타운 레드’(Paint The Town Red)는 스포티파이에서 여성 래퍼 역사상 가장 빠르게 1억 스트리밍을 달성한 노래가 됐다. 이전 히트곡 ‘세이 소’와 ‘키스 미 모어’의 기록은 이미 모조리 넘어섰다. 도자 캣이 “예전 앨범은 돈벌이용 팝 앨범”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과장법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던 것이다. 내 생각에 도자 캣의 이번 앨범은 지난 앨범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솔직한, 진정한 아티스트로서의 자기 발견이다.

그러니까 팬이란 대체 무엇인가. 팬으로서 우리는 대체 어디까지 권리가 있는 것일까.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발언을 통제하고 연애를 관리하며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까지도 팬의 권리가 되는 걸까. 그들이 시상식에서 팬덤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으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팬의 마음인 걸까. 소셜미디어 시대 이후 우리는 예전보다 더욱 강력하게 스스로를 소비자로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예인, 그중에서도 뮤지션과 팬의 관계 역시 달라졌다. 이제 팬인 우리는 뮤지션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음악을 ‘소비’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들의 ‘생산’에 관여하고 싶어 한다. 그들의 이미지를 통제하고 싶어 한다. 소비자가 없다면 생산자도 없다. 팬이 없다면 뮤지션도 없다. 이것은 2020년대의 명제가 되어가고 있다. 그 명제는 다시 말하자면 이 문장이다. 손님은 왕이다.

디온 워릭의 명곡 ‘워크 온 바이’(Walk On By)를 샘플링한 ‘페인트 더 타운 레드’에서 도자 캣은 노래한다. “나에겐 유명한 피처링이나 지원사격도 필요 없어. 새로운 팬도 필요 없어. 애인이 있거든. 니 마음에 들겠다고 가발 같은 걸 쓸 필요도 이젠 없어. 난 양방향으로 성공을 거뒀어. 내가 해낼 줄 몰랐지? 팬들이 다 바보는 아니야. 하지만 극단적인 애들은 멍청이야.” 나는 이 노래로 마침내 도자 캣의 팬이 됐다. 당신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문화 평론가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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