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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결함이 피부에까지 드러난다고 본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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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없는 아프리카 부족 블렘미아이. 1260년께 잉글랜드에서 만든 삽화 장식 기도서 ‘러틀랜드 시편집’에 그려져 있다. 시공사 제공 중세 시대의 몸 몸을 통해 탐색한 중세의 삶...

머리가 없는 아프리카 부족 블렘미아이. 1260년께 잉글랜드에서 만든 삽화 장식 기도서 ‘러틀랜드 시편집’에 그려져 있다. 시공사 제공
중세 시대의 몸

몸을 통해 탐색한 중세의 삶과 죽음, 예술

잭 하트넬 지음, 장성주 옮김 l 시공사 l 3만2000원

중세, 하면 대개 ‘암흑’이나 ‘야만’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도 그럴 것이 갖가지 마녀사냥이 횡행했고, “스멀거리는 어둠을 틈타 전쟁을 일으킬 궁리”가 가득한 시기였다. 하지만 영국의 미술사학자 잭 하트넬은 ‘중세 시대의 몸’에서 중세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에 “그것이 인체이든 시이든 회화 또는 연대기이든 간에,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강조한다. 놀랍게도 이유는 이렇다. “교양 있는 현대 사람처럼 보이려면 우리 자신과 노골적인 대비가 되어 줄 암울하고 무지한 과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은이는 “단순히 스스로의 비위를 맞추고 싶다는 이유로 시간상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중세)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면서, ‘몸’에 대한 중세 시대 사람들의 인식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삶과 예술에 반영되었는지 추적한다.

중세 시대 사람들의 몸에 대한 인식을 살피기 전에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중세 시대의 생물학이나 의학에 대한 관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부조리로 여겨질 만큼 오류”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없이 분명하고 논리적”인 이론들이었다. 중세 사람들은 세계의 맨 가장자리, 이를테면 아프리카 대륙의 동북쪽 끝자락에 ‘블렘미아이’(Blemmyae), 즉 “머리가 없는 인간들”이 산다고 믿었다. 이들은 얼굴 부분이 가슴 속으로 내려앉은, 하여 괴물처럼 보이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떤 문헌에는 키가 2.4미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체구를 지녔다고, 또 다른 문헌에는 “길 잃은 여행자를 잡아먹는 식인종”이라고 적혀 있다. 흥미롭게도 지은이는 블렘미아이를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현대인의 상상과 연결한다. (외계인의 존재 여부는 차치하고) 현대인들이 “태양계 바깥에서 만나리라고 믿는 키 작은 초록색 외계인”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중세 시대의 괴물족을 빚은 것과 똑같은 인간적 충동이 만든 것”이다. “평범한 중세 사람의 상상과 열망, 환상, 두려움 따위”를 껴안고 있다는 점에서 중세와 오늘은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파시쿨로 디 메디치나’(의학 자료집)라는 제목의 책에 실린 해부 장면 그림. 시공사 제공
다이어그램처럼 도식화된 뇌 속 구조를 고스란히 묘사한 사람의 머리. 13세기 중반 잉글랜드에서 세 가지 언어로 만든 백과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시공사 제공
피부에 대한 중세 사람들의 인식은 제법 높았다. 오늘날처럼 “투과성이 있어서 기후나 계절처럼 체액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요소를 몸속으로 흡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한도 많았다. 시각적으로 보자면 “여전히 속의 내용물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불투명한 장벽”이었다. 그래서일까, 중세 의사들은 피부를 진찰하면서 “환자의 식습관이나 체액 불균형 문제”뿐만 아니라 “도덕성 또는 영성의 결함까지 한눈에 파악”하곤 했다. 일례로 나병은 “피부보다 훨씬 깊숙한 개인의 인성 속 내밀한 곳에서 비롯되는 병”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나병자의 더럽혀진 몸은 내적 도덕성이 더럽혀진 결과로 간주”되었고, 오랜 시간 심각한 박해를 받았다. 지은이는 피부의 연장선상에 있는 옷에 대한 중세 사람들의 인식도 자세하게 소개한다. “피부색이나 체질 같은 고정된 성질과 달리” 옷은 “바꿔 입을 수 있는 피부”였다. 이런 이유로 중세 사람들은 옷으로 “갖가지 상이한 정체성을 무척이나 자유롭게 표현”했다. 물론 여기에도 차별은 존재했다. 대다수 중세 사람들은 애초에 무엇을 입을지 선택할 여지는 물론 능력도 없었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복식이 “불쾌하게 뒤섞이는 일”을 막기 위해 ‘사치 금지법’이라는 법령이 시행되는 곳이 많았다.

손은, 거기서 파생된 촉각은 중세 사람들에게 오감 중 “가장 천한 감각”으로 여겨졌다. “달콤하게 귀를 파고드는 노래나 포근하게 코에 스며드는 천상의 향기, 서서히 색조가 변해 가는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감각과 달리 촉각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동시적인 감각, 즉 철저히 능동적이지도, 철저히 수용적이지도 않”아서 거칠고 조잡스러운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촉각이 마냥 배척받지는 않았다. 촉각은 몸의 이상을 감지하는, 마지막에는 “생사를 판정하는 근본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촉각에 대한 편견을 뛰어넘기 위해 당시 외과의들은 “의료 도구와 자신들의 몸을 관념적으로 합쳐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서서히 계발해냈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수술칼이나 톱에 생명력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중세 사람의 손에서 “묵직하고 생기 없는 도구들”이 생명을 부여받을 정도였다. 물론 손 그 자체도 중요했다. 금욕과 금식, 묵언을 유지해야 했던 수도사들은 손가락 수다를 즐겼고, 연인들이 “손을 단단하게 잡는 행위”는 곧 약혼을 공표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16세기 초 서유럽에서 만들었으리라 추정되는 수술용 톱. 시공사 제공
11세기 말경 이탈리아에서 만든 음악 문헌에 수록된 음악가 귀도의 손. 시공사 제공
두초 디 부오닌세냐의 ‘프란체스코 수도사의 성모’. 1280년대에 그렸으리라 추정된다. 시공사 제공
중세의 가죽신 세 점. 맨 위 앞코가 기다란 풀랭은 14세기 잉글랜드에서 특히 유행했으리라 추정된다. 시공사 제공
손이 만백성에게 중요했다면 발은 높으신 분들에게 중요한 몸의 한 요소였다. 발은 “군주와 신민이 서로 접촉하는 결정적인 지점”이었다. 군주 앞에 무릎 꿇고 신발이나 발가락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충성과 경의의 궁극적인 증표”였다. 중세 귀족들은 “유독 기다란 신발”을 신었는데, 일부러 불편하게 만든 결과물이다. 앞코 길이만 발 길이의 거의 두 배에 이르는 신발도 있었는데, 이는 “딱히 고되게 일하거나 오래 걸을 필요가 없는 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종의 과시욕이었다. “의복 전체를 멋스럽게 조화시키려는” 당시 유행 풍조에 맞춰 신발도 멋스러움을 추구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지은이는 감각 기관, 뼈, 심장, 피, 배, 생식기 등을 통해 중세 사람들이 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 결과 어떤 삶과 문화가 태어났는지 찬찬히 소개한다. 지은이는 중세 시대를 오늘의 기준에 맞춰 재단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중세 세계의 어느 일면이나마 진정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당대의 기준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은이는 강조한다. ‘중세 시대의 몸’이 널리 읽힌다 해도 중세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답보 상태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1000년 후쯤, 그때도 지구가 존재한다면, 후대 사람들은 20세기와 21세기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사족처럼 대답을 달아보자면, 그때 사람들은 우리 시대를 일러 암흑기라고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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